7장 공정한 기운과 언론개혁/아선양호연지기我善養吾浩然之氣
<공손추> 상편 2장은 ‘부동심’과 ‘호연지기’로 매우 유명한 장이다. 전반부에 맹자와 공손추 사이에서 ‘부동심’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데, 공손추가 맹자의 ‘부동심’을 맹분孟賁과 비교하니까, 맹자는 오히려 고자告子가 자신보다 먼저 부동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대화한 후에 맹자는 북궁유와 맹시사를 거쳐, 자하와 증자까지 언급하며 부동심을 설명했는데, 다시 공손추가 맹자와 고자의 부동심의 차이에 대해서 물었다.
공손추 : 그러시다면 선생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과 고자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과 어디가 다른지 좀 설명하여 주십시오.
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맹자 : 고자는 ‘말로써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거든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라. 알 수 없는 일이거든 억지로 기氣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하였으니 알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기 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 한 것은 옳은 말이거니와, 말로써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거든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라 한 것은 잘못이다.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 言, 勿求於心, 不可.
<공손추> 상편 2장
맹자가 인용한 고자의 말은 ‘부득어언 물구어심不得於言 勿求於心’과 ‘부득어심 물구어기不得於心 勿求於氣’로 ‘마음[心]’이 두 문장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한글 맹자》의 번역에서는 마음의 역할을 잘 살리지 못했다. ‘말에서 얻지 얻었으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고, 마음에서 얻지 못했으면 기운에서 구하지 말라.’라고 번역하면 원문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이 두 문장 중에서 뒷문장은 맞고, 앞문장은 틀리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말[言], 마음[心], 기氣인데, 고자가 이미 말과 마음과 기운이라는 중요한 개념들을 포착했지만,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않았다고 맹자는 비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정약용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다.
고자의 배움은 대개 시비를 묻지 않고 오직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한 것이다. 말에 걸리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마음에 가려지고 빠지는 바가 있으며,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기가 그에 따라서 막히고 주리게 된다. 말에 걸리는 바가 있어 마음에서 구하면 병의 기미를 알 수 있고 마음에 만족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 기에서 구하면 병의 증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미는 병이 나기 전에 있고 증상은 병이 난 후에 있으니 병을 치료하는 자가 증상에서 구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기미에서 구하지 않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告子之學, 蓋不問是非, 惟以不動心爲主. 言有所跲, 則必其心有所蔽陷矣, 心有不慊, 則必其氣隨而沮餒矣. 言有跲而求於心, 則可知病祟, 心不慊而求於氣, 則可見病證. 然祟在病前, 證在病後, 治病者不求於證, 猶之可也, 不求於祟, 大不可也.
《맹자요의》
정약용은 병의 기미[病祟]와 증상[病證]의 예를 들어서 마음에서 구하는 것과 기에서 구하는 것을 대비하며 설명하는데, 증상에서 병의 치료법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병의 기미가 보일 때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고자가 앞문장 “부득어언 물구어심”이라며 ‘말에서 얻지 못했다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라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맹자와 공손추의 대화에서도 ‘마음’과 중심으로 ‘말’과 ‘기’ 모두 중요하게 보는 맹자의 관점이 잘 드러난다. 맹자가 고자의 부동심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공손추는 맹자의 부동심은 어떤 면에서 탁월한지 물어본다. 바로 여기서 부동심의 핵심으로 ‘지언知言’과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