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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야 May 17. 2024

반 발짝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고,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고, 익숙한 길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삶에 있어서도 안전한 방향을 선호했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은 채. 그러나 대게 나의 합리성은 합리화에 가까웠고, 크고 작은 선택에 번번이 실패하는 평범한 삶의 형태를 빚어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도 큰 변화는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날씨가 유난히 좋아 땅이 아니라 하늘을 보며 걷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돌계단을 오르고 나무로 만든 데크를 밟으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오는데, 뜻밖에도 오른쪽에 작게 난 산책로를 발견했다. 10년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한 길이었다. 그냥 땅을 보지 않다가 반 발짝 걸음을 잘못 옮겼을 뿐인데. 이토록 오래 다닌 길에서 산책로를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이 신기하기도, 어이없기도 해서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도 큰 변화는 없다. 용기가 없다면 후회와 자책 역시 사치임을 알면서도, 비겁함과 나약함에 몸부림치는 매일을 살고 있다. 다만 깊지 않은 숨을 내뱉는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려, 아주 가끔 반 발짝씩 게걸음을 치는 방법을 익히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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