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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메타포라 10차시 과제 - 인터뷰

by 카후나 Mar 15. 2025


부부 8쌍 중 1쌍은 난임 시술을 받는 2025년 한국 사회. 간절하게 아이를 기다리는 이들은 분명 우리 곁에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통계 속 숫자로만 존재하는 난임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울고 웃는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가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며 나의 가장 사적인 기록인 난임 일기를 책으로 엮었다. 나 먼저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아기가 100일이 되었을 때부터 3개월간 썼더니 그제야 4년간의 난임 이라는 사건이 나에게 어떤 경험이었는지 해석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사건에는 나 말고 또 다른 당사자가 존재하는데, 그에게는 이 시간이 어떤 경험이었는지 함께 겪은 사람인데도 잘 모른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지만, 남편은 왜 지나간 일에 대해 질문하냐며 대화를 다른 주제로 돌리곤 했다. 그는 평소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빨리 잊고 다음으로 건너가고 싶어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남편에게 묻고 싶었다. 난임이라는 사건이 당신에겐 어떤 경험이었는지. 뭐가 가장 힘들었고, 기뻤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우리는 이제 18개월이 된 딸을 재우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M(48)은 2020년 카후나와 결혼하며 서울로 이주한 독일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가능한 한 일 년에 한두 달 정도는 오토바이 여행을 하며(휴가 기간이 긴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그러던 중 2018년 가을, 갑자기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꼭 맞는 사람을 만나니 오랫동안 가진 생각도 바뀌었다고 했다.


세 식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자 몸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6개월 동안 배란테스트기까지 열심히 챙겨가며 임신을 시도를 했는데 매번 임신 테스트기를 해볼 필요도 없이 생리가 시작되었다. 피임하지 않으면 임신은 당장 되는 걸로만 알아서 당황했지만, 둘 다 나이가 많으니(당시 카후나 39세, M 44세) 시간이 좀 걸리나 보다 싶었다. 그래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단 혹시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 보자 싶어, 난임 검사를 했다가 남편이 무정자증에 가까운 극희소정자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정상적인 정자 수는 정액 1ml당 6천만 개 정도(출처: 서울 아산 병원)인데 남편의 검사 결과에는 숫자 5가 적혀있었다.


진단받았을 때, 충격받지 않았어?

“놀라긴 했지만, 충격까진 아니었어. 목숨에는 지장이 없잖아.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근데 너한테는 미안했어. 시험관이 아니면 임신을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이런 상황인 줄 알았으면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야.”

충격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내가 곁에서 지켜봤을 땐 그가 검사 결과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1년이 걸렸다. 그는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중고 실험실 현미경을 사서 집에서 보기도 했고(보인다고 주장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말한다), 다시 재검사를 하자며 대학병원까지 총 세 군데에서 정액 검사를 받았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염색체 검사였다. 남편은 1,000명 당 1명 꼴로 발생하는 로버트소니언 염색체 전좌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한 염색체의 일부가 다른 염색체로 옮겨간 현상으로 유전자의 결실 또는 중복이 없어 본인은 건강하다. 자신도 모르고 살다가 임신이 잘 안돼서 난임 병원에 가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편의 경우 조직 검사까지 하고 알게 된 것은 정자가 될 정원세포에는 문제가 없는데 성숙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염색체가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근데 난임 검진부터 출산까지 그 4년 동안 뭐가 제일 힘들었어?

“불확실함.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해야 하나, 그 불안이 사람을 죽이는 거였어. 난임 기간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수 있다는 걸 몰랐어. 당연히 두세 번 만에 임신하는 줄로만 알았지.”

군인이었던 그는 시험관 시술 10차를 진행했던 그 3년의 시간을 꼭 철조망 아래서 포복 훈련을 하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다. “훈련에는 끝이라도 있지. 그것만 보면서 견디는 건데, 이건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잖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자책했다. 주사도 나만 맞고, 유산도 임신도 출산도 모두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내가 훨씬 힘들다고, 심지어 나만 힘들다고 단정 지었다. 내 고통에만 집중하느라 바로 옆 사람의 고통에 둔감했다.


혹시 우리가 지금까지 시술을 계속하고 있었으면 우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꿈 깨셔. 난 여기 없어. 우린 아마 같이 살기 어려웠을 거야.”

난임 기간 내내 내가 주는 스트레스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고 했다. 비임신으로 한 차수가 끝나면 2~3주는 완전히 우울에 잠식된 사람과 살아야 하는데 그게 고역 중 고역이었다고. 차라리 나를 만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힘든 그 시기에 그럼 뭐가 좀 도움이 되었어? 그래도 힘을 준 게 있을 거 아냐?

“맥주. 난 단순해. 그리고 계속 비임신이라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 그냥 평소처럼 내 인생을 살았어.  좋아하는 맥주 마시러 가고, 기분 좋아지는 오토바이 영상이나 사진도 자주 보고.”

난임 시술을 인생의 중심에 놓고 기대하는 미래가 당장 오지 않는다고 난리치던 나완 달리, 남편은 현재의 삶을 살줄 알았다. 그는 당시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에 집중하며 살려고 했다. 그땐 그 모습이 참 철없어 보였는데 지금 돌아보니 남편이 “바다 보러 양양 가자”, “한강에 산책 가자”, “피맥하러 나가자”고 해준 게 나를 지켜줬다는 걸 이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외국인으로 한국 병원에서 난임 진료를 보는 건 어땠어?

“독일에 비해 비용이 훨씬 저렴하고, 예약도 쉽게 할 수 있고, 대체로 큰 불만은 없어. 언어로 불편했던 적도 거의 없었어. 다들 나보다 영어 잘하시더라. 그런데 공장식 상업적인 시스템은 정말 별로였어.”

가뜩이나 시험관 시술 자체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면서도 사적인 아이 낳기를 사무적인 업무처럼 바꿔버리는데, 한국 대형 난임 병원에서는 자신을 한 사람이 아닌 ‘환자 번호’나 ‘카드 번호’로 본다고 느꼈다고 했다. 극희소정자증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체계적인 설명 없이 검사 결과만 받았고, 원무과에서 결제하고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구체적인 이유 없이 다양한 시술이나 비타민 수액 등 상품 소개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병원에서 자신을 아이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큰 비용도 지불할 의향이 있는 '고객'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편은 졸리다며 이만 마치자고 했다. 옛날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나는 식탁에 남아 휴대전화에서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사진을 열어봤다. 웃을 일이 없는 암흑의 시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밝은 표정의 사진이 많았다. 난임 기간 동안 남편이 한 일이 전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진 속 내 표정을 보면서 그가 내 일상을 지켜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말하지 않는다고, 생색내지 않는다고 기여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4년간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남편은 그런 날마다 푹 숙인 내 고개를 들어주었다. 희소정자증, 중기 유산, 지속적인 비임신과 조기 배란 등 칙칙한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우리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남편은 매일을 환대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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