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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과언니 May 26. 2022

퇴근길, 질경이가 괜히 반가운 날

낯선 길 위에 있을 때 내 눈이 바지런히 찾는 것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날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삽질만 했거나 내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결국 폭망 하여 참담함을 맛봤다거나 하는 일마다 사람과 엉켜서 감정 소모만 잔뜩 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몹시 피곤한 날 말이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일 텐데, 마음속은 온통 스크레치가 나서 벌겋게 덧나버리고 만다.


'아, 생각을 좀 하고 할걸.' 

'평소에는 잘 물어보다가... 오늘은 왜 물어보지도 않고 해 버렸을까'

'아, 하필이면 왜 그때 나를 부르냐고' 등 하나마나한 말들이 계속 머리에서 발사되어 마음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내내 생채기를 낸다. 그러다 보면 길을 잃어버린 듯 느껴진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는지, 내가 이 일을 업이라고 할 수 있는지, 괜히 적성도 아닌데 착각하고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지금이라도 접고 빨리 새 출발을 해야 하는지까지 마음속에서 한 차례 거대한 폭풍이 인다. 


이런 마음 상태가 '내가 지금 길을 잃었군' 하고 말풍선 뜨듯 문자화 되어 생각이 읽힐 때면,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들었던 질경이 생각이 난다.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퇴근길은 끝도 없는 부정적 에너지의 발산으로 점철되었을 텐데, 질경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다고 여겨진다. 


질경이의 다른 이름은 차전초(車前草)이며, 그 씨앗은 차전자(車前子)라고 한다. 수레가 닿는 곳에 있는 풀이라는 뜻으로 바퀴에 눌리고 발에 밟혀도 질긴 생명력으로 나고 나고 또 난다. 동물의 몸에 씨앗이 붙어 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통로가 되는 '길'에서 많이 발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야산이나 들에서 길을 잃었을 때, 질경이를 찾아 질경이가 자라고 있는 지점을 따라 내려오면 다른 길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질경이의 생김새를 잘 알아두라는 이야기였다. 수업 중 잠깐 환기를 하기 위해 우리들에 들려주셨던 이야기인데, 한 번씩 길과 관련되었을 때마다 떠오른다.


'그래 질경이를 찾자. 질경이를'

시커멓게 그늘이 드리운 야생의 숲과 같았던 하루,  길을 잃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오늘 나의 질경이는 무엇이 되려나' 하고 이렇게 애를 쓰며 생각을 겨우겨우 돌리게 되면, 스위치가 딸깍하고 장면을 전환해준다.


'그래, 너무 관성적으로 일하는 건 좀 반성하자. 담에 잘하면 되지 뭐'

'그래, 그래도 실수 인정했고, 사과했고, 정정할 기회 생겼고. 그럼 됐지. 최악은 아니야'

' 그 사람도 급했고, 나도 급했고.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선방했음 됐지 뭐'


동네에 접어들어 길가 좌우를 눈으로 훑으며 걷다 보면 어김없이 질경이가 눈에 들어온다. 매일 밟힐 텐데... 나는 손으로 쓰윽 한번 잎을 만져본다. 강아지풀 다음으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풀, 질경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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