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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Oct 20. 2024

달라의 교환 일기 _여섯 번째 1

그들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문학, 우리의 예술

달리에게


편지가 많이 늦었습니다. 그 사이 계절은 확연히 바뀌어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어요. 오늘은 가을비가 내립니다. 가을은 아름다운데 저는 그저 좀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에요. 사실 저의 무기력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긴 해요. 변화하고 싶지만 변하고 싶지 않고 달라지고 싶지만 또 달라지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편지를 쓰지 못하는 사이 정말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지금까지 온 나라가 들썩이는 중이에요. 비록 무기력한 저이지만 진심으로 참 기뻤습니다. 아니 기쁜 정도가 아니라 감격스러웠어요. 한강 작가의 소설은 <채식주의자> 말곤 읽은 것이 없는데 말이에요. 이상하게 눈물이 다 나려고 하더라고요. 제가 한강 작가 친구도 아니고 그의 팬도 아닌데 말입니다. 


 좀 민망하지만 전 문학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어요. 중학생 시절부터 문학과 지성사의 누런 표지의 시집을 사 모으고 20대 시절엔 문학 동아리에서 시를 쓰던 ‘문학소녀’였어요. ‘문학소녀’라는 표현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때의 저를 잘 표현하는 말이에요. 알쏭달쏭한 시들을 읽으면서 알쏭달쏭해서 오히려 지적 호기심과 지적 허영을 동시에 채웠고 국어시간에 배우는 작가인 황순원과 이광수, 김유정의 소설을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 책가방을 던져 놓고 소설과 시를 읽었습니다. 제 취향은 계몽적인 이광수보다, 토속적인 김유정보다 단연코 서정적인 황순원이었어요. 그리고 그의 아들인 시인 황동규의 시도 좋아했어요. 현대 작가로는 이문열과 이청준을 읽었는데 십대 시절 제 문학 리스트에 여성작가는 없었어요. 예민한 자의식을 가지고 이제 막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십대인 저는 남성 작가의 글을 보면서 의식 무의식 깊이 남성적, 가부장적 시선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 짐작합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에요. 제가 읽은 글들은 온통 ‘남성’의 글이었으니까요. 


 저의 문학 리스트에 ‘여성’이 등장한 건 이십대 중반이 지나면서였어요. 그 당시 인기 있던 소설가들은 여성작가가 많았어요. 서점 가판대는 그 여성 작가들 차지였어요. 그런데 문학 동아리의 남자 사람 선배들은 여성 작가들의 문학을 사소설이라고 부르면서 폄하하는 듯 했어요. 문학 전공자가 아닌 저는 ‘사소설’이라는 전문용어(?) 앞에 살짝 주눅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적이지 않나요? 개인에게서 출발하지 않은 거대한 이야기가 있나요? 마흔이 넘어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란 명제 앞에서 주눅 든 저의 지난날들이 환해졌답니다! 


그런데 문학 애호가(?) 저에게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은 문학하는 남성들에 대해 더 나아가 문학이란 것에 대한 적잖은 충격과 경멸을 가져왔어요. 누구는 문학은 잘못이 없다고 했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낭만으로 생각하는 남성작가들의 글이, 그들의 젠더인식이 경악스러웠어요. 그런 (후진) 글을 쓰는 남성작가가 문학을 하려는, 문인을 지망하는 여성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었던 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한층 더 괴롭혔던 것은 제 또래 문학을 사랑하는, 각종 인문학과 문학 강좌의 주요 소비자들인 중년 여성들이 그 성폭력범인 남성 작가들을 옹호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어요. 

문학 뿐 아니라 예술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여러 움직임을 보면서 그 운동의 감격스러움과는 별개로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던 문학과 저의 시간이 오염되고 짓밟힌 거 같았어요. 그러나 생업이기도 하며 제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그림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를 멀리 할 수 없었고 그 멀리두지 못함은 자주 저에게 일종의 분열증을 가져왔어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기쁘다 못해 감격스러웠던 것은 제가 사랑하는 문학에 대한 사랑을 되찾을 수 있어서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을 하려는 여성들, 예술에 마음을 빼앗긴 어린 여성들에게 문학과 예술을 앞으로도 계속 꿈꿔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였어요. 여성을 발아래 깔고 세운 그들의 문학, 그들의 예술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문학, 우리의 예술을 하면 된다고 많은 여성창작자들에게 말해 주는 거 같았어요. 

만약 한강 작가가 아니라 남성중심 가부장 사회, 문단 내 음침한 카르텔이 오래 고대하던 성폭력범죄자인 원로작가나 진보문학계의 큰 형님인 마초 작가가 수상했더라면 저의 문학 혐오는 깊어졌을 거예요. 그러니 저의 문학 사랑과 예술 사랑을 되찾게 해준 노벨 문학상에 감사하기까지 했답니다. 무엇보다 오래도록 글을 쓴 한강 작가가 고마웠습니다. 


오래도록 편지를 쓰지 못하다가 달라의 교환일기를 다시 쓰게 한 한강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정말 다시 한 번 기쁘게 축하하며 편지를 마쳐요.   


늦은 답장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소라가 

에드워드 아디존_ 엘리너 파전의 동화책 <작은 책방> 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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