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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Dec 11. 2024

아는 여자의 한 표

이기는 자들이 아닌 잘 지는 이들이 버텨서 만드는 것

  늘 이맘때면 한해의 절반이 가버렸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절반이 가버렸던 혹은 남았든 이 시간의 감각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의 것이다. 무엇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딱히 없는 나는 자연의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간다. 기를 써도 안 될 일은 안 되고 벌어질 일은 벌어지겠지 한다. 올봄은 특히 안으로 밖으로 속이 시끄러웠다. 그런데 속은 시끄러워도 장을 봐서 밥은 해 먹어야 하고 달마다 해결해야 할 일은 꼬박꼬박 돌아온다. 몸에 배인 습관대로 어쩔 수없이 움직이는 일상은 무기력을 깨우기도 하는데 엄마와 함께 가는 시장보기도 그중 하나다. 

 곧 여든을 앞둔 엄마는 계단이 있는 버스를 타지 않는다. 멀리 장을 보러 가면 꼭 나에게 저상버스인지 아닌지 확인을 시킨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관절이 불편해서다. 중년의 나이인 나도 계단을 올라가 교통카드를 찍는 버스보다 저상버스가 한결 편하다. 장을 보고 오는 길, 바퀴 달린 수레를 가지고 버스를 탈 때 늙은 엄마와 늙어가는 나는 사이좋게 저상버스를 반긴다. 


 대선과 지방선거 사이, 어느 날에도 엄마와 장을 보러 갔다. 그 무렵 아침엔 인터넷을 열면 여름처럼 뜨거운 봄볕 아래 단식농성을 하는 두 활동가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그 두 얼굴을 넘기고 나면 지하철 역사 안에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권 투쟁을 하는 장애인 활동가들과 장애인 부모들이 컴퓨터 화면을 채웠다. 저상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아침의 얼굴들이 떠올라서 엄마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엄마, 계단이 있으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버스를 탈 수 없잖아, 그리고 지하철엔 계단이 얼마나 많아.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에서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죽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 뒤 오래 장애인들이 싸워서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만들었어. 저상버스도 그렇고 말이야”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온통 노인네들뿐인데, 나라 것들은 그렇게 해달라고 백날 천날 말해야 하나 해줄까 말까지, 사람 죽기 전에 해주면 좀 좋냐” 

“그런데 그 예산을 줄인대나 뭐라나, 그래서 요즘 지하철에서 장애인들이 시위를 하는 거야” 

엄마는 내 이야기를 눈빛을 빛내며 들었는데 당신이 타는 저상 버스의 이력이 짜릿한 것 같았다. 이런 일상과 연결된 사소함은 우리 집 두 노인들의 투표에 영향이 크다. 젊은 세대가 몰린다는 사전투표를 우리 집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아버지가 한다. 아버지는 코로나 격리 중에도 사전투표를 하러 갔고 지방선거도 사전투표로 했다. 선거 홍보물을 가장 꼼꼼하게 살피는 이도 엄마와 아버지다. 


 한때 70세가 넘은 노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말이 떠돈 적이 있다.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내가 지지하는 후보와 정당에게 표를 주지 않는, 늘 계급을 이반 하는 노인들에게 투표권을 박탈하자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스스로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섭고 징그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무시하는 그 가난한 노인들은 치밀한 실용주의자라서 여든넷 아버지의 한 표는 당신의 이해와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다. 아버지 한 표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언제나 노인복지에 관한 정책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현재 삶에 따라 한 표를 행사한다. 정치적 냉소주의나 정치혐오 같은 건 아버지에게 찾을 수가 없다. 우리 집에서 허세 없는 한 표를 행사하는 이는 가장 늙은 아버지다. 한편 공정한 원칙 아래 합리적인 태도를 지닌 이는 엄마인데 후보의 삶과 정치경력, 이룬 성과들을 살펴서 투표를 한다. 기후위기라는 개념어를 모를 뿐 생태 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은 이도 엄마다. 

 집에서 가장 왼쪽의 정치성향을 지닌 나는 3월의 대선도 6월 첫날의 지방선거도 큰 기대가 없었다. 내가 바라고 지향하는 세계는 기호 1번과 2번에서는 늘 찾을 수가 없었다. 맘 같아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몸에 익은 오랜 습관으로 투표소에 갔다.   


 점심이 지나 느지막이 나간 투표소는 한산했다. 그런데 투표 관리원으론 보이지 않는 중년 남자와 젊은 남자 한 명이 여러 명의 청년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그 청년들이 장애가 있다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이 적어 빨리 끝날 투표가 이 청년들 덕에 좀 지체되었다. 이 지체됨이 여러 장의 투표용지를 두 번 나눠하는 번거로운 선거에서 생기 있게 빛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지력이 떨어져 판단이 흐린 노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는 말과 발달장애가 있는 청년의 한 표를 떠올리며 비장애 비혼 프리랜서 중년 여성인 나도 투표를 마쳤다. 비밀투표의 원칙을 깨고 밝히자면 나는 1번과 2번만이 존재하는 투표용지엔 무효표로 내 의지를 밝혔다. 누구도 선택할 수 없어서, 아니 싫어서 무효를 선택한 나의 표가 존중받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존중받듯 계급을 이반 하는 노인의 표도 발달장애의 청년의 한 표도 존중받길 바란다. 

 노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는 이들, 혹은 발달 장애가 있는 이들의 한 표를 의심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는 한 나는 어찌 되었든 투표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무효표더라도 세상은 이기는 자들이 아닌 잘 지는 이들이 버텨서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이건 믿음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항상 증명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단지 우리가 자주 잊을 뿐. 


*2022년에 쓴 글을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올리게 되었다. 지금도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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