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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Mar 17. 2023

프로젝트 런웨이가 현실로 (1)

첫 수업부터 개 박살이 났다.

어느새 컴퓨터 랩실 벽은 나의 작업을 포함한 모든 친구들의 작업으로 빼곡했다. 다들 첫 과제를 평가받는 자리라 그런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교수님은 랩실 중앙을 걸으며 천천히 과제들을 스캔하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두 종이를 꺼내 들고 마커로 정확히 두 단어를 적었다.


‘Good’

‘Great’


그리고 한쪽 벽에는 Good, 다른 한쪽 벽에는 Great이 적힌 종이를 붙였다.


“과제를 다시 붙여볼까? 너희 과제가 평타는 친다거나 그럭저럭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Good. 너희의 모든 에너지와 영감을 과제에 쏟아부었고 결과물이 아주 훌륭하다라고 생각되면 Great의 벽으로.”


교수님의 한마디로 교실 안은 금세 웅성거렸고 다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주저하다 한 두 명씩 자기 과제를 다시 붙이기 시작했다. 나도 일단 내 과제를 벽에서 떼어내고 아이들의 동향을 살폈다. 사실 교실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나는 기가 팍 죽었다. 지난밤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과제를 하던 어제의 나를 쥐어 패고 싶었다.


검은색 마커로 휙휙 갈긴 내 작업에 비해 다른 아이들의 과제는 과히 대단했기 때문이다. 빛나는 색과 패턴 심지어 입체적인 요소까지 곁들인 획기적인 작업 옆에 초라한 내 작업을 나란히 붙일 수가 없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첫 과제에 저렇게 까지 해야 해?’

맞다, 저렇게 해야 했다. 앞으로도 저렇게 치열하게 해야만 이 아트스쿨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뉴욕에 도착해서 며칠 동안 학교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 내 마음속에 오만함이 스멀스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귀여운 아이들이 내 클래스메이트 였고, 나는 어엿하게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남들 다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4년 차 대리로 일한 경력이 있는 어른이었다. 내가 당연히 그들보다 더 멋지고 여유롭게 학교 프로그램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정말이지 안일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내 스펙으로 한국에서 받았던 엄마 친구들의 부러움과 후배들의 존경심은 여기에서 아무 짜기 쓸모없었다. 나는 그저 한국인 유학생일 뿐이었고 내가 이전에 무슨 대학을 졸업했건 어떤 회사를 다녔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에겐 이름조차 모를 대학교와 회사였다. 중요한 건 현재 형편없는 내 실력이었고 그깟 대학 졸업장과 경력증명서로 그 형편없는 실력이 가려지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스물여덟의 나는 열여덟의 그들과 똑같은 출발선상에서 달리는 것이다.


그깟 사회생활의 ‘짬’ 때문에 뉴욕을 잠시나마 얕봤던 내 자신이 쪽팔렸다.


기가 죽은 나는 내 과제를 다시 Good 벽에 붙이고 교수님의 크리틱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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