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과 스물일곱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다.
크고 작은 공황발작은 계속되었다. 답답하고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이 올 때마다 스스로가 참 한심하고 미웠다. 겉에서 보면 걱정할 것들이 하나도 없는 내 인생에서 왜 그렇게 질질 짜며 신파극을 써 내려가는 걸까. 뭐가 불만족스러워서 이러는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나를 좀 토닥여줄걸 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나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 싫었다.
그렇게 자책하고 질질 짜는 시기는 한 동안 계속되었고, 동시에 불면증이 찾아왔다. 왜인지 모르게 편히 잠을 잘 수 없었고, 출근 버스에서 잠깐 조는 시간이 내 수면시간의 전부였다. 내 몸과 마음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출근길에도, 회사에서도, 퇴근길에서도 늘 무기력했고, 우울했다. 분명 뭔가 제대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힘도 의지도 이미 바닥이 났기에 바테리가 방전된 대로 살았다.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우리 부모님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나 조차도 나를 이해 못 하는데 당연히 당신들께서 나에게 묘한 해결책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온전히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동굴 속에서 그렇게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 이 문제의 원인을 드디어 찾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원인 분석은 간단했다. “지금 내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단 한 개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였고 나에겐 나만의 취향(趣向)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27년을 그렇게 열심히 달려오며 살았는데 정작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난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리스트업 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겁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써 내려갔다.
파란색
쿨톤
질감
건축물
옷감
패턴
…
써 내려간 단어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대부분 시각적인 것들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그림 그려볼까?’라는 정말 뜬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의 작은 미술 학원에 등록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이 그런 케이스였다. 내가 등록했던 미술학원에는 성인들을 위한 취미반이 있었는데 그 반에서 잉크 드로잉부터 시작했다. 26년을 문과생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초등학교 때의 피아노 레슨과 잠깐 다녔던 미술학원이 내 예체능 수업의 전부였다. 그런 내가 스물여섯과 스물일곱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