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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Nov 09. 2023

나의 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순풍이 되어주기도..

그림일기

  그림일기를 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유하기 시작한 지 햇수로 만 3년이 되었다. 무슨 어른이 그림일기를 쓰냐고 할까 봐 쑥스러웠다. 나의 안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텐데, 굳이 온라인에 업로드까지 하는 게 민망했다. 하지만 비공개 커뮤니티라는 사실에 용기 내서 그림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나의 하루가 담긴 일기장 아래에는 오늘도 고생 많았다는 따뜻한 댓글이 하나둘씩 달렸다. 지극히 평범했던 하루라서 일기 쓸 거리도 없었던 날이어도 잠들기 전 몇 글자를 적었다. 그저 그런 나의 일상을 보고 “반찬이 맛있어 보여요.”, “오늘 하늘이 참 예뻤죠?” 하고 나의 혼잣말에 화답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오며 가며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어느덧 300장이 넘는 그림일기를 쓰게 되었다.


  그림일기는 별일 없는 나의 하루를 특별하게 기록해 주는 마법이었다. 다음 날 더 예쁘게 나의 일상을 담아내기 위해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림일기가 내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삶의 영양제로 자리 잡았지만 누군가에게 그림일기를 강하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마다 취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내가 좋아한다고 남에게 덥석 권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SNS를 보면 각종 추천으로 난무하는 세상이다. 저 사람은 어떻게 “이거 꼭 사세요! 두 번 사세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한번 써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또 오세요.”하고 말을 꺼내기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사람한테는 참 낯 간지러운 말이다. 나는 그냥 온라인 메이트님들과 우리만의 보물인 양 그림일기를 향유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커뮤니티의 대표님이 그림일기 전시회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림일기를 그리는 분 중에는 손재주 있는 분들이 많았다. 미술 전공자는 아무도 없지만 디지털 드로잉을 꾸준히 해오면서 수준급의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그림산책’이라는 프로젝트로 시작된 엄마들의 작품이 날이 갈수록 훌륭해지고 있어서 우리끼리만 보기에는 아까웠다. 그렇게 우리는 ‘킨더줄리 그림일기 x 그림산책 전시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나는 출품할 수 있는 결과물이 그림일기 밖에 없었다. 유명 인플루언서도 아닌데 누가 내 일상을 들여다볼까 싶었다. 하지만 몇 년간 정을 쌓아온 분들과 함께 하기로 약속한 일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전시회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시회에 불참해도 모두가 이해할 만한 그럴싸한 명분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뒷걸음질 치고 싶어 하는 나에게 고삐라도 채워주듯 단체 채팅방에서는 전시회 준비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분들이 있었다. 나한테는 멋진 그림작품도, 빠른 실행력도 없지만 늘 귀감이 되어주는 감사한 인복이 가득하다. 앞서 준비하고 계신 부지런한 메이트님들을 보며 나도 부랴부랴 손을 움직여보기로 결심했다.


  320장의 그림일기를 한 장 한 장 다시 읽어보며 전시용 책에 넣을 일기 스무 장을 골랐다.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것 같았던 이전 일기를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추억여행에 빨려 들어갔다. 과거의 내가 어떤 생각에 잠겨있었는지 현시점에 다시 돌아보니 신기했다. 이루어놓은 일 없이 시간만 흘려보냈다고 한탄했는데, 일기를 보니 나는 참 열심히 지낸 것 같기도 했다.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나의 그림 발전사도 재미있었다. 우스깡스럽게 그려놓았던 나의 반려견 그림이 이제는 제법 봐줄 만해졌다. 그림일기에 매번 사진만 넣는 게 민망해서 한 달에 한 장씩 그려보던 그림을 모아서 스티커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차분히 지난 3년을 돌아보니 나도 출품할 그림일기책과 나만의 굿즈 스티커를 제작하는 게 가능해졌다.


  메이트님들 따라서 얼결에 준비하게 된 전시회 출품작을 들고 지난 월요일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벽에 그림을 걸고 테이블에 일기장과 자체제작 굿즈를 올려두고 나니 꽤 근사한 공간이 완성됐다. 지역 문화회관에서 전시를 하다 보니 문화센터 수업을 들으러 오시는 어르신들께서 주 관람객이 되어주셨다. 디지털 드로잉으로 그린 그림을 이렇게 액자처럼 만들어 걸 수 있냐고 놀라시는 분, 매일 일기를 이렇게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계셨다. 어떤 어플을 사용해야 하는지, 수업하며 알려줄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판매 수익금을 좋은 곳에 기부할 거라고 하니 스티커, 키링, 볼펜 등 우리의 자체제작 굿즈를 구매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전시회장에서 보내는 날짜가 지날수록 내 마음에는 뿌듯함이 쌓여갔다.


  그림일기 쓰는 일이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고 나니 그 가치를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전시회장에서 우리의 그림일기를 보고 감탄하며 “나도 이렇게 해봐야겠다.” 하시는 분들을 보니 새삼 옛 생각이 떠올랐다. 3년 전 내가 그림일기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도 마찬가지였다. 킨더줄리 대표, 줄리썸머님의 예쁜 그림일기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블로그에 공유한 그분의 그림일기에는 아들과 함께하는 엄마의 일상,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는 멋진 활동들이 담겨있었다. 나도 그림일기를 쓰다 보면 근사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함께 하자고 손 내밀어주신 분이 줄리썸머님이셨다. 그렇게 따라 하기 시작한 그림일기였는데, 이제는 익숙한 생활이 되었다고 일기의 매력을 잠시 망각했나 보다. 이번 전시회가 나에게 다시 일깨워줬다. 나에게는 뻔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슬쩍 밀어주는 신선한 바람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좋아서 3년째 공들여서 하고 있는 일이라면 자신 있게 누군가에게 권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야 용기 내어 한 마디 꺼내본다.


  “저랑 같이 그림일기 쓰실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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