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교육
겨울 방학이 시작된 지 고작 사흘차, 우리 집은 벌써 전쟁터가 되었다. 이불속에서 안 나오는 아이를 깨우느라 큰 소리 내는 걸로 하루가 시작된다. 준비해 둔 아침 대신 간식거리부터 입에 넣으려는 아이를 말리느라 잔소리가 곧바로 이어진다. 그러고 나면 홈스쿨링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말싸움이 벌어진다.
우리 아이는 예체능 전공을 희망한다. 다른 친구들이 영어, 수학 학원에 갈 때면 아이는 발레 수업을 듣고 따로 개인 연습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고 싶은 발레에만 집중해도 되면 참 좋으련만, 어쩌겠나? 대한민국 입시제도를 따라가려면 어느 정도 내신 성적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걸 아이도 안다. 잔소리꾼 엄마와 같이 공부하는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이는 마지못해 책상 앞에 앉는다.
예체능 입시생이 수학 실력까지 탁월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안다. 그래서 아이한테 심화 문제 풀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기본 개념 정도라도 알고 넘어가자는 게 내 아이에 대한 수학 수업 목표다. 하지만 아이가 느끼는 피로도는 나와 확연히 다르다. 별거 아닌 기본 문제 몇 개를 풀고도 이내 지쳐버린다. 아이도 나도 지쳐서 학기 중에는 아예 수학 공부를 내려두었다. 학교 정규 수업 시간에 수학을 배우는 게 전부였다. 중학교 1학년 수학 공부를 탄탄히 하지 못한 채 2학년에 진학하면 더 힘들어질 게 뻔하다. 그래서 이번 겨울 방학만큼은 수학 공부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아이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주 내내 투닥거렸다.
수학 공부가 싫은 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 푸는 게 힘들다며 엄마한테 있는 대로 짜증 내는 모습까지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예의 없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날카로워졌다. 엄마의 언성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눈치껏 수그러들 만도 한데, 사춘기 아이는 무서운 게 없나 보다. 엄마의 야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풀풀거렸다. 화를 꾹꾹 눌러보지만 내 머릿속 압력은 점점 올라가고, 마침내 정수리 뚜껑은 펑하고 날아가버렸다. 뚜껑 열린 엄마 입에서는 모진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억울하다는 듯 아이는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이의 태도 한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하니 하나에서 열까지 다 눈에 거슬렸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아이방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그 방 문을 닫아버린 지 몇 달이 지났다. 엄연히 다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나 어릴 적과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나도 모르게 중학교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방이 두 개였다. 작은 방은 오빠가 쓰고, 큰 방에는 엄마 아빠의 살림살이로 가득했고 구석에 작은 내 책상이 놓여있었다. 내 멋대로 쓸 수 있는 공간은 1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난 그곳에 앉아 매일 책을 읽고 숙제를 했다. 살면서 엄마한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우리 딸 모습이 영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아이의 불평과 짜증은 그저 복에 겨운 소리로만 들렸다.
종종 아이는 학원에 도착하면 평소와는 다르게 공손한 태도로 나한테 전화할 때가 있다. 발레복을 안 챙겨 왔는데 엄마가 가져다주면 좋겠다고 상냥하게 이야기한다. 발레 입시생이 발레복을 안 챙겨가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다 돌아가는 길에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게 엄마 마음이다. 한두 번 챙겨줬더니 이제는 도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주 준비물 챙기는 걸 잊는 것이 아닌가? 지난달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학원 선생님께 부탁 말씀을 드렸다. “저희 아이가 발레복이나 슈즈를 안 챙겨가면 그날 수업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주세요.”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게 부끄럽지만 강한 해결책이 있지 않으면 아이는 스스로 챙기지 않을 것 같아서 입 밖에 꺼내기 힘든 말을 해보기도 했다. 뭘 하려면 메모지에 준비물 리스트부터 작성하고 하나씩 지워가는 나와는 참 다른 성격이라 덜렁거리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내 뱃속에서 나왔지만 나와 성향이 정반대인 아이를 키우는 일이 나한테는 가장 풀기 어려운 고난이도 문제와 같다. 아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오늘처럼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면 내 인내심도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아이한테 한바탕 쓴소리를 쏟아붓고 집밖으로 나왔다. 내 자식도 제대로 못 가르치면서 남의 자식 가르치러 가는 게 우습지만, 희한하게 다른 집 애들은 예쁘게 앉아서 내 설명에 귀 기울여 듣는다. 그런 모습을 보니 내 새끼만 문제가 있나 싶어 또 야속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나처럼 알아서 제 할 일 하는 딸을 낳았는데, 나는 왜 정반대의 아이를 낳았을까?’ 하늘을 원망하던 순간 갑자기 엄마가 입버릇처럼 동네 아주머니께 하던 말이 생각났다.
“저는 애들한테 뭐 하라는 말 전혀 안 해요. 지들이 알아서 잘해줘서 고맙죠.”
‘내가 잘 나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알아서 잘하게끔 환경을 만들어준 게 우리 엄마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뭐 하나 강요하지 않고, 나의 선택을 믿고 기다려주는 그 시간 동안 우리 엄마도 가슴이 답답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부모 속 썩이지 않고 잘 컸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제 잘난 맛에 부모한테 기쁨만 안겨줬다고 착각하고 살은 게 죄송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엄마 생각을 하니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웠다. 혼자 드라마라도 찍는 양 차 안에서 펑펑 울고 나니 하루종일 답답하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아이는 학원에 갔고 집안은 난장판이다. 평소 같으면 ’에휴‘하고 한숨부터 쉴 테지만, 오늘은 못 본 척 넘어가 본다. 뭐든 미리 준비하고 말끔하게 정리해야 하는 엄마를 만나서 내 딸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항상 자기보다 한 발 앞서서 계획하고 기다리는 엄마 때문에 숨이 막혔을 것 같기도 하다.
늦은 밤 학원 앞에서 엄마를 본 아이의 입꼬리는 잔뜩 올라가 있다. “엄망~ 제일 좋아아~”하고 애교 섞인 말을 건네는 걸 보니 낮에 엄마한테 야단맞은 일을 벌써 다 잊은 모양이다. 뒤끝이 보통 아니게 심한 나에 비하면 아이 성격이 훨씬 낫구나 싶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가지씩 내 아이의 장점을 찾아서 기록해 봐야겠다. 몇 번까지 적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리고 오늘밤 잠들기 전에 꼭 친정엄마한테도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 저 높은 곳에서도 매일 내 일상을 지켜보고 계신가 보다. 항상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면 내 앞에 짠 하고 나타나시니 말이다.
”엄마~ 고마워요. 오늘도 한수 배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