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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Jan 18. 2024

스스로를 사랑해야 연인을 품을 수 있다.

뮤지컬 라스트파이브이어스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이 왔다. 내가 덕질하는 배우님이 1년 만에 국내 뮤지컬 무대로 돌아왔다. 작품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연장으로 달려가야 할 일이었다. 낮에 수업을 끝내자마자 집으로 달려와서 부랴부랴 청소기를 돌렸다. 진작에 목욕탕 청소 좀 해둘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지저분해 보일까?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서두르면 목욕탕 청소까지 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 전에 간단히 저녁이라도 먹고 출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그렇다. 난 아주머니 팬이다. 보고 싶은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면 식구들한테 잔소리 듣지 않도록 유난히 더 집안일을 열심히 해두고 공연장으로 향하는 주부 관객이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됩니다. 공연을 보시는 동안 여러분의 잠자고 있는 사랑 세포는 모두 깨우시고, 휴대폰 전원은 꺼두시길 바랍니다.”


  나의 귀를 행복하게 하는 이충주 배우님의 목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아, 이 작품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구나. 사랑 세포? 그게 뭐였더라?’


  선남선녀의 웨딩 장면이 담긴 포스터를 보고 대충 짐작은 했다. 연애 세포가 다 죽어버린 중년의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공연이라는 것을 말이다.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두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독특하게도 남녀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여주인공 캐시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며 무대를 연다. 반면에 남주인공 제이미는 그린 라이트가 켜져 몸과 마음이 붕붕 뜨는 순간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극명하게 대조되는 둘의 표정을 보니 첫 장면부터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사랑 세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래! 사랑은 저렇게 주체할 수 없이 행복하고, 가슴 미어지도록 아픈 것이었지.’


  베테랑 배우 2명의 2인극으로 진행되는 공연은 시작과 동시에 나를 무대 속으로 쑥 끌어당겼다. 젊은 나이에 인정받는 천재 작가 제이미는 성공가도 위에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일도 사랑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캐시의 일은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는다. 따분하기만 한 시골 무대를 벗어나 도심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연기하고 싶지만, 오디션을 보는 족족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친구의 책이 자랑스러웠다. 작가의 연인으로서 인터뷰하는 기분도 꽤 괜찮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는 듯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제이미 곁에 있던 캐시의 자존감은 서서히 무너져 갔고,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제이미는 캐시를 응원한다고 줄곧 말했지만, 캐시의 마음에 닿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5년 동안 뜨겁게 사랑했던 시간은 결국 이별로 마무리됐다.


  작가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사는 삶보다는 온전한 나의 인생 프레임을 먼저 만들고 싶었던 캐시,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응원하는 나’의 모습은 너무 작아 보였나보다.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주는 뮤즈였던 캐시를 사랑했던 제이미, 그에게 ‘내 것을 조금 내려두고 연인의 성장을 위해 애쓰는 나‘의 모습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랑스럽던 두 연인의 이별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20대의 젊은 나이에는 나도 그랬으니까… 남들보다 먼저 자리 잡는 친구들을 보면 조급증이 났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나의 발전을 잠시 미뤄두고 그 사람을 위해 먼저 등 떠밀어주는 건 참기 힘들었다. 나 자신이 너무 소중한 나머지, 내 마음을 보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오래 전의 예쁘던 모습과 못났던 모습이 뒤엉켜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어디쯤 왔어? 도착하기 10분 전에 연락해. 버섯 수프 데워놓을게.”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떠올랐다. ‘나 오늘 저녁 굶었구나.’ 집에 오니 진눈깨비가 내리는 겨울밤에 어울리는 따끈한 수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수프 한 접시를 먹고 나니 오랜만에 깨어난 사랑 세포의 온도가 올라갔나 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고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긴 시간 공들여 쌓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파트타임 정도의 일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래도 짬짬이 집안을 살피고,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면 늘 곁에서 함께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다. 당장 내 꿈을 펼칠 수는 없지만 가족을 응원하며 한 템포 쉬어가는 지금의 나도 충분히 근사하다.


  마음 근육이 얄팍해서 나 하나를 끌어안기에도 불안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탄탄해진 마음 근육은 남편과 아이가 동시에 안겨도 끄떡없다. 중년 아주머니의 사랑 뮤지컬 관람기는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지어 본다.



https://youtu.be/cWlx2mDzDIk?si=-53wAg6N-ReLlKsu

뮤지컬 라스트파이브이어스 - 제이미 이충주



https://youtu.be/4Y-E12vAxvI?si=wsMkGivjQItWtSVX

뮤지컬 라스트파이브이어스 - 캐시 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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