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여행, 그리고 커피
1년에 한 번 떠나는 해외여행, 나는 그 며칠을 위해 한 해를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새로운 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는 기분은 나에게 기대 이상의 활력을 불어넣곤 한다. 다음에는 어디로 떠나볼까 궁리를 하면서 또 다른 1년을 살아내는 건 참 행복한 기다림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하나도 설레지 않았던 여행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난가을 친정 식구들과 다녀온 괌 가족여행이었다.
떠나기 전부터 여행 간다는 기분보다는 숙제하러 간다는 느낌이 많았다. 시댁 식구들과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이제 아이들이 제법 커서 각자 자기 짐을 스스로 들 수 있는 나이인데, 난 뭐가 그렇게 부담스러웠을까? 아마도 고공행진하던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 한 해 뉴스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바로 ‘물가 인상’이었다. 특히 팬데믹 기간 동안 발생한 전 세계적인 공급 불균형과 대규모 현금 유동성 영향으로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가 잡히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미국 본토와는 거리상 많이 떨어져 있지만 괌 역시 미국령이라서 물가 수준이 보통 아니라는 소식을 여행 후기에서 종종 접할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떠나는 가족 여행인데 경비 때문에 맘껏 즐기지 못하고 오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매번 밥 한 끼 사 먹을 때마다 카드 결제를 했다가는 돌아와서 카드값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만 같았다. 미리 여행 예산을 짜두고 준비된 금액 안에서만 써야할 것 같아 출발 전 은행에 들러 환전을 했다. 다행히 2~3년 전쯤 원달러 환율이 1,100원일 때 환전해서 외화 통장에 넣어둔 돈이 꽤 있었다. 여행 가면서 현금을 들고 다니는 게 부담스럽고 번거롭긴 하지만, 이번 여행만큼은 돈 걱정 없이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 쓰고 싶었다. 두툼한 돈 봉투를 집어드니 여행 준비를 다 끝낸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우리가 여행 갔던 기간이 우기라서 그랬는지, 괌에 도착하자마자 주룩주룩 내리는 비와 습기 가득한 공기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괌의 첫인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게 여행지의 만족감을 좌지우지하는 큰 요소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날씨, 또 다른 하나는 음식이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맛있는 음식으로라도 만족감을 끌어올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착하자마자 근처 맛집을 검색했다. 중국 음식이야 어느 나라에 가든 평균 이상은 하니까, 숙소 근처 중국집에서 첫 번째 식사를 했다. 음식은 대체적으로 맛있어서 가족들 모두 잘 먹었다. 그런데 계산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먹었다고?’ 계산서를 재차 확인했지만 모두 주문한 음식이 맞았다. 앞으로 지낼 5박 6일간의 식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괌에 머무는 동안 식사를 할 때나 슈퍼마켓에서 간식거리를 살 때나 화들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괌 물가에 적응하기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달러 표시 전광판만 봐도 ‘이곳은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미국입니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더운 날씨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간절했지만, 우리 세 식구만 단출하게 온 여행이 아니었다. 대가족이 음료수 하나씩만 사 마셔도 몇 만 원이 휘리릭 지갑에서 빠져나가게 될 테니까 참아야만 했다. 한 번은 아이들한테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사줬는데, 1 스쿱에 8천 원이나 했다. 5명이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먹고 4만 원을 내는 순간에는 그저 웃음만 허허 나왔다.
다행히 첫날에만 비가 내리고 이후부터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다. 맑은 공기, 파란 하늘, 투명한 바닷물에 예쁜 열대어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 없이 멋진 자연환경을 뽐내는 휴양지였다. 어딜 가나 웃으며 상냥하게 인사하는 이곳 사람들의 미소도 참 좋았다. 그런데 딱 하나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카페인이었다. 100미터마다 테이크아웃 커피점 하나씩은 만나게 되는 대한민국 풍경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숙소 주변에서 커피를 사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호텔 1층 로비 라운지뿐이었다. 둘째 날 로비 라운지를 지나가며 슬쩍 메뉴판을 봤다. 커피 한잔에 ‘$7’라고 적혀있었다. 물론 세금 별도이다. 세금까지 하면 우리나라 돈으로 약 만원쯤 할 테니 선뜻 주문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셋째 날 아침, 아이들을 수영장에 풀어두고 썬베드에 누웠다. 예쁜 하늘과 야자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여기에 딱 한 가지만 더하면 완벽할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친정아빠를 모시고 골프장에 간 오빠한테 메시지가 왔다. “커피 마시고 싶으면 시켜 먹고, 애들 배고프다고 하면 피자랑 햄버거도 주문해.“ 여럿이 여행 오면 커피 한잔에도 이렇게 눈치 보게 되는 걸까? 소심한 내 모습이 우습긴 했지만 며칠 만에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이렇게 고민해 본 적이 있던가?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아니면 카페라테? 뜨겁게 시킬까? 아니면 아이스? 메뉴판을 보며 한참 고민한 끝에 결정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니까 1달러 더 비싸더라도 끌리는 걸 시키기로 했다. 따뜻한 라테 한잔을 받아 드는 순간, 이 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내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 환상은 아주 잠시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맛보는 순간 내 입에서 바로 불평이 튀어나왔다. ”이게 만원이 넘는 커피라고?“ 우유는 너무 데워져서 뜨거웠고, 커피의 쌉싸름한 맛과 구수한 향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밍밍한 커피를 마시면서 나도 모르게 국뽕에 가득 찬 생각들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바리스타님들 정말 일 잘하시는구나’하고 칭찬이 절로 나왔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어딜 가든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수려한 라테아트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 카페 천국인 나라에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커피에 대한 기대치가 상당히 높아졌나 보다. 이왕 놀러 온 거 기분 좋은 기억만 가져가고 싶었다. 괌 커피에 불만을 품기보다는 내 나라의 장점을 떠올려 보기로..
그리고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얻은 꿀팁 한 가지!
‘앞으로 커피 맛이 별로인 나라로 여행 갈 때는 꼭 일회용 드립백을 챙겨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