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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Mar 15. 2024

또 신학기 증후군인가?

진로 고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긴 겨울 방학이 드디어 끝났다. 새 학기 적응만 잘하면 이제 엄마의 방학이 시작되겠거니 기대하며 속으로 기뻐했다. 엄마만 홀가분한 시간을 맞이하는 게 샘이 났던 것일까? 아이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큰 고민거리를 들고 왔다.


“나 발레리나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어졌어. 사실 나 예전부터 승무원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 지금이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난 승무원이 될래.”


여행이라면 마음이 바운스 바운스하는 엄마다. 딸이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 하면 온 힘을 다해 응원해 줄 일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코 앞에 다가온 여행이 무산됐을 때보다 더 안타깝고 속상했다. 다음 달에 있을 콩쿠르 준비를 위해 몇 달을 쉬지 않고 달려온 아이였다. 방학 동안 나들이 한번 안 가고 연습실에 오가면서도 가기 싫다는 말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진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또 심경의 변화가 찾아온 걸까?


발레 전공 준비생에게 겨울은 폭풍전야와 같은 시기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수시로 콩쿠르가 열린다. 초가을쯤이면 대부분의 콩쿠르가 마무리되고 입시 시즌이 된다. 아마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시는 전문가들이 봄, 여름에는 콩쿠르에서 심사하고 가을, 겨울에는 입시 실기 시험에서 평가하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본다. 당장 그해 입시를 치르는 아이가 아니라면 겨울은 굉장히 평화롭고 조용한 시즌이다. 하지만 봄이 되면 바로 시작될 콩쿠르 대비를 위해 혹독한 트레이닝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묵묵히 실력을 쌓아나가다가도 당장 봄에 무대에 서서 실력을 뽐낼 생각을 하면 덜컥 겁이 나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할 수 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시험 전날 갑자기 내가 열이 펄펄 나고 아팠으면 하고 바란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안 그래도 콩쿠르를 앞두고 부담감이 커져가는 3월인데, 새 학기 시작은 아이의 마음에 요란한 소용돌이를 만든다. 우리 아이는 일반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방과 후 친구들은 같은 학원으로 향하는데, 혼자 발레 학원으로 가는 길은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그래도 학기 초에 친한 친구들 그룹이 형성될 때만큼은 나도 올 한 해 의지하며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절친 한두 명쯤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작년 이맘 때도 아이는 발레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같이 간식 사 먹고 학원에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데자뷔처럼 1년 만에 같은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학창 시절 친구와 함께 맛있는 떡볶이를 사 먹고 달콤한 음료수로 입가심하며 하하 호호 수다 떨던 추억이 떠오른다. 지극히 평범하지만 지금도 빙그레 웃게 되는 사춘기 소녀들의 일상이다. 그런데 우리 딸에게는 그 모습이 아주 특별한 일이다.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체형 관리를 위해 먹고 싶은 간식을 마음 놓고 즐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번 콩쿠르 끝나면 탕후루 꼭 한번 먹어볼래.” 전국에 탕후루 열풍이 불던 지난여름에 아이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다. 이 한 마디만 봐도 아이가 발레리나의 꿈과 얼마나 많은 것을 맞바꿨는지 알 수 있다.


우정이나 먹는 즐거움과 같은 일상의 행복은 소소해 보이지만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한테 네 꿈을 위해 아쉬워도 참고 이겨내라는 강요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인생 기니까 하고 싶은 거 뭐든 다하라는 성의 없는 응원을 할 수도 없다. 한 가지를 이루기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데, 두 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도록 다양한 방향으로 폭넓게 진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대화를 나눠주는 일뿐이다. 발레를 할 때와 다른 공부를 할 때 느낌이 어떤지, 발레리나가 되었을 때와 승무원이 되었을 때 기분이 어떨 것 같은지 이야기를 나누어봤다. 그리고 AI 기술이 더 발전할수록 발레리나와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해서도 대화해 봤다. 아이가 갑작스레 진로를 변경하고 싶다고 하면서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심도 있는 토론을 하게 되었다.


아이의 고민을 나눌 때는 나의 개인적인 고민을 끌어안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버겁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가 헤매고 있는 인생 미로 위에 드론을 한 대 띄우고 싶다. 미로 지도를 선명하게 찍어서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하지만 내 인생 미로도 아직 탈출하지 못한 상태인데, 아이의 인생 미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턱이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가 의욕 없이 주저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느 길이 맞는지 몰라 비록 헤맬지라도 이 길, 저길 걸어보며 다양한 시도를 하려고 애쓴다는 게 얼마나 대견한지 모른다.


작년 이맘때 그랬던 것처럼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발레 전공 대비를 지속하게 될지, 아니면 발레를 아예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 발레를 선택하게 된다 해도 내년 3월이면 또 신학기 증후군처럼 같은 고민을 반복할 수도 있다. 그래도 속상해하거나 답답해하지 말자. 미로 게임을 해도 한 번에 길을 찾기는 어렵다. 하물며 인생 미로는 어떻겠는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돌아가야 할 때도 있지만, 지치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미로 찾기 게임을 즐겨보자고 오늘도 다짐, 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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