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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우진 Dec 02. 2021

공간을 비우다, 나를 만나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 그 가운데에서 나를 발견하는 기쁨

   

집에 물건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은 비움보다는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서 잠시 긴장을 늦추면 갖가지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만 해도 지나치게 장난감을 많이 사주지 말아야지 했었다. 실제로 아이를 낳고 돌이 될 무렵까지도 국민장난감이라는 타이틀을 단 장난감은 두 개가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6개월 무렵 남편이 해외발령을 받아 남편은 외국으로 아이와 나는 친정에 더부살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이 지나면 남편이 있는 외국으로 나갈 예정이었기에 장난감을 산다한들 들고 갈 수도 없었다. 반강제적으로 아이의 장난감에 대한 엄마의 욕구는 날개를 펼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첫돌이 지나 드디어 외국에 나가 생활하게 되었다. 친정에 얹혀 살며 물건 하나 늘리기도 눈치 보였기에 독립을 하여 내 살림을 다시 꾸리면 마음껏 살림살이를 펼쳐놓고 싶은 욕구가 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짐을 늘리는 게 의미가 없었다. 외국에서 세 식구 단란하게 살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공간을 장만하고 살았지만 공수레 공수거였다. 아무것도 가지고 돌아갈 수 없었기에 또 다시 물욕은 조금만 참자로 다스려지고 있었다.     

외국에서의 생활이 1년을 지나갈 즈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외국의 특성인지 24평 아파트이건만 방 하나, 거실하나였다. 그만큼 거실은 방 두 개와 거실 하나를 합친 것처럼 넓었다. 운동장만큼 광활한 거실에는 식탁과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텅 빈 그 공간은 안 그래도 외로운 타국에서의 육아를 더 없이 고독하게, 외롭게 만들었다.     

공간이 빌 지언정 아이와 나는 행복한 추억으로 하루를 채워갈 수도 있었을텐데 하루가 저물면 또 다시 시작하는 하루의 긴 공백은 무한하게만 느껴지는 시간 앞에 나를 더욱더 고독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고독감이 외로움이 되고, 외로움이 우울감이 될 무렵 이 쓸쓸한 공간을 무언가로 채우면 텅 비어버린 내 마음도 채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을 살았건만 예정된 외국 생활은 아직도 2년이나 더 남은 터였다. 언제까지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살고 싶지 않았다. 한 달을 더 살지라도 사람 사는 느낌이 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 실력으로 현지 인터넷 쇼핑몰을 찾아 헤맸다. 제일 먼저 자잘한 아들 장난감이 들어오고, 뒤이어 쇼파가 들어왔다. 새로운 물건 하나에 설레임 하나가 따라왔다. 새로운 장난감 하나에 아이가 놀 것이 생겼고, 그건 곧 찰나지만 나에게 자유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물건이 가져다주는 신선한 바람에 외로움도 우울감도 잊혀 지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건이 들어오고, 곧이어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다. 물욕의 정점에 실내 사이클이 놓였다. 종일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까지 하는 상황에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 운동 부족이었다. 하지만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실내 사이클을 산다 해도 할 시간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산다한들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꾹꾹 눌러 담은 물욕이 분출하며 텅 빈 공간을 물건으로 채워나갔다.      

물욕의 끝은 한국으로의 복귀였다. 제 아무리 그것들을 이고 살 기세로 샀을지라도 운임료까지 지불하며 국내로 들고 갈 가치는 없었다. 운임료를 지불할 바에야 차라리 한국에서 다시 사는 값이 더 싸게 치였다.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결국 손에 쥐고 가는 것은 하나 없다'라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때 모든 게 부질없음을 느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친정 살며, 외국서 살며 번듯하게 살림을 꾸리고 살지 못했다는 보상심리는 그간 사지 못했던 것을 다 사겠다며 구매 욕구를 불태웠다. 게다가 한국에 들어와 알게 된 아이의 언어 발달 지연은 외국에서 지내며 제때 필요한 장난감을 구매하지 않았다는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 핑계로 연령대보다 낮은 수준의 장난감까지 사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못해준 것에 대한 미안함까지 합쳐져 아이 장난감에 대한 집착은 전투의지 마냥 활활 타올랐다.      

장난감 광고에는 기본생활, 의사소통, 탐구논리, 역할놀이, 창의력, 색인지, 신체인식 및 조절 등 ‘이것만 사면 네 아들은 훨씬 말을 잘할거야.’라며 나를 현혹시켰다.      

그간 못해 준거 다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거실에는 5단짜리 국민책장 두 개가 제일 먼저 들어섰고, 널찍한 책장은 순식간에 전집으로 채워졌다. 거기다 아들의 언어표현을 자극시켜줄 갖가지 장난감은 뽀로로, 콩순이에서부터 언어치료실에서 사용한다는 교구들, 노래하는 강아지 인형까지 차곡차곡 들어왔다.     

그즈음 또 다시 찾아오는 현실자각 타임. 엄마의 욕심으로 들여놓은 것들을 내 아이가 하나하나 마스터하며 신나게 놀아주면 들인 돈도 아깝지 않으련만 내 아이가 원하는 건 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오직 하나, 바로 엄마인 나였다. 장엄하게 들어선 장난감들과 책, 한글 학습지들은 집안 한 켠을 차지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우악스럽게 채워진 물건들을 보며 내 마음의 짐도 늘어났다.      

이것도 해줘야 하고 저것도 해줘야 하는데

이것도 갖고 놀고 저것도 갖고 놀아야 하는데 

그런데 넌 왜 안 갖고 노니?     

그와 덩달아 굴러다니는 잡동사니의 갯수와 종류도 늘어났다. 집안일을 해야 할 시간이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기분 좋게 산 장난감들이었건만 성가셔지기 시작했다. 갖고 놀고 나면 치우면서 짜증이 났고, 안 갖고 놀면 안 갖고 노는 대로 짜증이 났다.      

이건 아니다. 사람 살기 위한 집인데 물건들을 모시고 사는 꼴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정리를 하노라 마음을 먹었다. 그때 내 마음을 울린 한 마디가 있었다.     

"공간만 유한한 게 아니라 시간도 유한합니다. 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그것을 다 사용할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때 처음으로 하루의 유한함을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아, 내 아이가 이 많은 것들을 다 사용하기에는 시간적인 제한도 있구나'     

한글 학습지를 아무리 사다 모은다 한들 어린 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 그것을 마주할 시간이 길어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끽해봐야 1시간도 안 될 일을 언어발달을 위한답시고 비우지도 못한 채 이고지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버리기 힘든 물건들을 비울 때면 시간을 생각해본다. 이것을 할 시간적 여유가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일주일에 한 시간도 채 할 여유가 없는 것들은 아무리 갖고 있고 싶어도 비울 용기가 생겼다.

결국 공간을 정리하는 건,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과도 같았다.      

그래서 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냐고?

아니.      

 애정하는 인터넷 카페 <1일 1정리>에서 ‘우리 집엔 아무 것도 없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집에 아무 것도 없다니 왠지 상쾌하고 후련할 것 같았건만 아무 것도 없는 마룻바닥에 멍~하니 누워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내게 ‘아~후련해.’가 아니라 충격을 주었다.

‘저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외국에서 텅 비어있는 거실에 누워있어 본 나는 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내는 하루의 공허함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그 하루가 쌓이고, 쌓이고, 쌓이면서 삶의 허무함으로까지 이어졌던 우울한 날을 지나 왔기에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 삶을 공허하게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잘 사용할 물건들로 공간을 채우는 일의 중요함을 안다. 그리고 다 쓰지도 못할 물건들을 쌓아놓고 사는 삶의 버거움도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내가 맥시멀리스트는 지양하되 지나친 미니멀리스트도 거부하는 이유이다.      

 ‘필요 없는 것은 버리되, 잘 사용할 것들만 남길 것’     

 지금까지도 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미련과 욕심을 담은 물건들은 내 보냈다. 아이의 나이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의 장난감들과 더 이상 읽지 않을 책들과 이별했다. 공간을 차지하던 크나큰 4층짜리 인형의 집과 각종 유아 블럭들을 보낸 대신 그 자리에 아이를 위한 새로운 RC카가 들어왔다.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철 지난 장난감들은 방치되었던 반면 RC카는 아들의 새로운 애정품이 되었다. 그만큼 아이가 컸다는 게 눈에 보였다.

 덩달아 나를 위한 물건도 들어왔다. 실내 사이클이 집 한 켠에 자리 잡았고, 아이를 재운 밤이면 조용히 페달을 굴린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여자였지’ 

새로 들인 물건이 잊고 있던 나를 8년 만에 일깨워 주었다. 

 남편의 소소한 취미인 햄스터 키울 공간은 진즉에 넓어진 터였다.


 잘 쓰고, 좋아하는 것들로 공간을 채운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 담긴 사람을 알아 간다는 것. 텅 빈 공간에서도, 욕심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도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나니 그제 서야 나와 우리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집이 그 사람을 반영한다는 말은 이럴 때도 적용되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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