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뭘까 (2020)
“나 좋아하지 마.”
“그게 뭔데?”
“나 좋아하지 말라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나는 <사랑이 뭘까>의 테루코를 보고 저 싸이월드 감성의 글귀가 떠올랐다. 영화 <사랑이 뭘까> 속에서 사랑은 마치 권력관계처럼 그려진다. 관계에 갑이 있고(테루코 앞의 마모루, 스미레, 요코, 요코의 아버지), 을이 있다(테루코, 스미레 앞의 마모루, 나카하라, 요코의 어머니). 을은 갑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언제나 갑은 미지근할 뿐이다. 짝사랑 같은 것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좀 기묘한 구석이 있다. 갑이 을의 사랑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을의 마음을 아는 갑이 이 마음을 받아줄 것인지 밀어낼 것인지를 결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이 뭘까>는 이 기묘한 사랑의 역학을 조명한다. 더 많이 마음을 주는 사람이 언제나 패배하는 이 게임을, 행복한 로맨스도 우울한 비극도 아닌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테루코는 자신의 존재는 오직 마모루의 시간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마모루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서 마모루가 되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목표를 이루겠다는 듯 그녀는 마모루가 농담처럼 흘린 그의 꿈인 코끼리 사육사가 된다. 나는 마모루가 코끼리 사육사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테루코가 야구선수가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미련하리 만치 테루코가 마모루를 사랑해도, 마모루는 대꾸하는 기색도 없다. 마모루는 테루코를 내쫓다 못해 “네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다행이야” 같은 말까지 전한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쪽은 테루코다. 테루코는 계속 마모루 곁에 머무르기 위해 더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른 남자를 소개받아 마모루와 함께 만날 기회를 만든다. 마치 마모루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모루는 테루코에게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테루코의 사랑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만이 아닌 듯하다. 테루코의 친구 요코는 테루코에게 마모루 같은 사람을 그만 만나라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요코와 나카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이 상황은 참 아이러니하다. 나카하라에게 요코는 테루코에게 마모루 같은 사람이다. 상대에게 미련한 을들 사이에는 묘한 동지애가 흐르는 것 같다. 그저 눈길 한 번이면 되고, 빈자리가 생겼을 때 내게 잠시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 을들은 분명 외롭다. 사랑이 게임이었다면 이들은 분명 패배자다. 그러나 외로운 패배자 일지 언정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다. 나카하라는 후반부에 이르러 테루코에게 바보 같다고 말하며 더는 요코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유는 이런 식으로 관계가 지속된다면 요코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 나쁜 사람처럼 비칠까 봐. 온통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 뒤에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 처절함을 차마 비웃을 수는 없다.
영화가 연애와 사랑에 있어 단순히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분법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연애 사이에 존재하는 동역학을 표현하는 것에 가깝다. 마모루는 테루코에게 매정하지만, 스미레 앞에서는 마모루 앞의 테루코처럼 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 같은 이 사랑의 역학은 누구나 누군가 앞에서는 사랑의 을이 되기도, 사랑의 갑이 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주는 것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영화 <사랑이 뭘까>는 사랑이 뭐라고 답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묘한 사랑을 마주하면서 섣불리 우리는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답답하게 보이는 이들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을까 망설이던 찰나에 나를 수긍하게 만든 장면이 있다. 그렇게 요코를 떠난 나카하라는 작은 사진전을 연다. 사진전에는 요코의 뒷모습을 찍었던 사진 역시 걸려있다. 그렇게 자신을 떠난 나카하라가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요코는 인터넷 검색을 해 나카하라의 사진전을 찾아간다. 사진전에서 만나 뒤를 돌아 미소를 보이는 요코의 모습은 나카하라의 시점 쇼트로 촬영되어있다. 요코의 미소.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언제나 뒷모습만 바라보는 사랑을 하던 나카하라는 그제야 요코의 정면에 서서 미소를 마주한다. 계속 그렇게 정면을 서로 응시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그 기적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나카하라를 요코에게 다시 돌아오도록 만들 것이다. 그렇게 미련하게 자신을 사랑하다가 떠난 나카하라를 다시 자신에게 오게 만드는 것이 다소 잔인할 지라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은 일말의 희망이 된다. 그 희망의 순간을 나카하라의 눈으로 보면서 나는 이 미련한 사랑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도 좋아하지 말라는 말에 “그래 알겠어”라고 답하지 못한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그리 쉽게 되겠나. 우리 모두는 테루코처럼 좋아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남 일일 때야 미련하게 보여도, 내 일이 되면 내가 테루코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테루코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 테루코를 위해 변호 한마디를 하자면, 테루코는 결코 마모루에게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패배를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으려 하기까지 하는 그런 존재다.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뭐냐고?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사랑이 뭘까>를 질문인 채로 남겨 놓고 싶다. 환희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아픈 상처이기도 한 그것을 나는 그 미묘한 질문 그대로 남겨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