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다비전 (2020)
이 글이 업로드되는 날(2021년 12월 11일)은 '디즈니 플러스'의 한국 서비스 출범이 만으로 딱 한 달이 되는 날이다. <완다비전>에 관한 글을 이제야 쓰는 것은 디즈니 플러스와 오리지널 콘텐츠들에 대한 화제성이 한 달 사이 많이 식어버린 탓에 뒷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넘어가기엔 <완다비전>은 꽤 매력적인 시리즈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할 예정이다. 때문에 <완다비전>의 매력을 소개하는 글이지만 아쉽게도 디즈니 플러스 구독을 망설이는 독자에게 선택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서비스 출범 이후 한 달이 지나 글을 쓰게 된 것이 오히려 좋은 상황일 수도 있겠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할 예정이니 부디 아직 <완다비전>을 보지 않은 독자들은 물러서 주시길. <완다비전>을 보고 돌아와서 다시 읽어준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완다비전>은 다소 당황스럽게도 시트콤이다. 그것도 1950년대 미국 시트콤. 시트콤은 아주 예상 밖의 결과다. <완다비전>을 재생하면서 우리는 당연하게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웅담을 기대했으니까. 우리가 당황하건 말건 <완다비전>은 아랑곳 않고 최선을 다해서 50년대 시트콤처럼 보이려고 한다. 의상, 화면의 질감, 방청객의 웃음소리, 조악한 특수효과에 에피소드의 이야기 구성과 참견쟁이 이웃 같은 전형적인 유형의 인물까지, 마치 실제 50년대 시트콤의 에피소드를 하나 가져온 것 같을 정도다. 50년대 시트콤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TV 시리즈의 에피소드 구성을 십분 활용하듯 <완다비전>은 에피소드가 하나 넘어갈 때마다 다음 연대의 시트콤으로 넘어간다. 이 에피소드들의 시트콤 연대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화면비와 흑백/컬러라는 기술-역사적 계보다. 50~60년대(에피소드 1~2)까지는 흑백 화면과 오래된 TV의 1.33:1의 화면비를 사용하고, 70년대(에피소드 3)는 화면비는 그대로지만 컬러 화면이 등장, 80년대(에피소드 5~)부터는 흔히 HD TV의 화면비로 알고 있는 1.78:1의 화면비를 사용한다. 당대의 유명 시트콤을 총망라한 듯한 각 에피소드의 시트콤 연출은 <완다비전>의 재미 요소 중 하나다.
<완다비전>은 이 시트콤 연출을 단순히 시트콤 만들기에 사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주 영리하게 활용한다. 앞서 두 개의 화면비(1.33:1, 1.78:1)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완다비전>에 등장하는 화면비가 하나 더 있다. 보통 극장 상영되는 영화에 사용되는 2.39:1의 화면비가 바로 그것이다. 완다가 능력을 통해 만든 허구의 시트콤 바깥 세계를 보여줄 때 사용되는 이 화면비는 현실과 환각의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눈에 띄는 요소다. 화면비를 다르게 하지 않더라도 두 세계는 한눈에 구분될 것 같지만, 그럼에도 화면비의 구분을 둔 것은 온전히 다른 세계임을 가장 기초적인 차원부터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촬영에 쓰인 카메라, 후보정을 통해 얻은 화면의 질감, 화면비까지 두 세계는 서사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물질적인 차원에서도 완벽하게 구분된다. 말하자면 <완다비전>에서 시트콤과 현실의 구분은 단순한 영역의 구분이 아닌 물적 토대를 달리하는 서로 다른 세계의 구분이다. 덧붙여 시트콤 바깥의 세상에 영화의 화면비가 사용된 것은 바깥세상과 영화의 세상인 MCU를 서사 안과 밖으로 연결한다. 서로 다른 화면비를 통해 <완다비전>은 TV와 스크린을 유려하게 연결하고, 동시에 자신의 매체 특성을 서사에 녹여 이야기 속의 두 세계를 매력적으로 구분해낸다.
제럴딘(모니카)이 완다에 의해 추방당하는 장면에서 화면비가 천천히 바뀌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연결과 균열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영화에서는 가변적 화면비를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화면비를 변화시켜 두 세계의 연결과 구별을 보여주는 것은 극장이 아닌 디즈니 플러스에서 보여줄 수 있는 아주 경제적이고 탁월한 선택이다. 또 다른 매체적 특성의 일부인 시트콤의 장르적 형식은 세계를 구분하는 것뿐 아니라 세계의 이상신호를 드러내는 데에도 활용된다. 시트콤의 연출 톤에서 벗어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에피소드 1의 후반부가 자아내는 긴장감은 스스로 장르의 관습을 잠시 벗어나 지금 이 시리즈가 시트콤인 게 뭔가 이상하지 않냐는 시그널을 시청자에게 보낸다. 가볍고 밝은 시트콤의 분위기는 갑자기 분위기에 변화가 생길 때 긴장감과 기묘함을 극대화하기에 좋은 선택이다. 불행한 삶을 거쳐 밝은 곳으로 도피하려는 완다의 마음을 떠올릴 때, 시트콤은 캐릭터의 서사와도 잘 맞물린 선택이다. 걱정을 모두 잊고 시트콤 같은 세상 속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은 완다만이 아니기 때문에 완다의 사연은 더욱 애틋해진다.
<완다비전>은 TV 속의 TV 구성을 통해 우리를 이중 시청자로 만든다. 동시에 이 이중구조를 통해 TV 시리즈라는 매체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며 서로 다른 세계들을 유려하게 엮어낸다. 드라마 속 두 세계가, 또 텔레비전과 스크린이, 나아가 실제 현실 세계와 허구의 MCU가 이 이중구조 속에서 관계하게 된다. 또 이 구조 속에서 각각의 세계는 상호작용을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이중 시청자로서, 우리는 TV 속에서 TV를 보고 있는 등장인물들과 모종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넷플릭스와 달리 매주 새 에피소드를 공개하는 방식을 선택한 디즈니는 한 에피소드가 방영된 다음 사람들이 나눌 수많은 추측들을 예상이라도 한 듯 에피소드 4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도대체 이 시트콤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완다비전>은 자신이 텔레비전에 방영될 시리즈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 매체적 특성을 직접 활용한다. 이 점에서 디즈니의 자신감이 돋보인다. '우리 TV 시리즈에 관해 이만큼 준비하고 시작하는 거야' 라며 <완다비전>을 선봉장에 내세운 것 같은. 그렇기에 <완다비전>은 디즈니 플러스의 첫 작품으로 손색없는 작품이다. 텔레비전, 그리고 <완다비전>. 각운까지 딱 들어맞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