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세상이 끝나가면 내 곁에 와줄 거지?
해피투게더(1997)
망한 사랑 서사는 자주 내 심금을 울린다. 폭풍의 언덕을 밤새워 읽으며 몇 장씩 필사를 했고, 해리포터를 보고는 스네이프를 오랫동안 덕질했다. JP saxe와 Julia Michaels의 곡 'If the world was ending'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인 것 같다. '우리는 이제 만날 수 없는 사이지만, 그렇지만 만약 세상이 끝난다면 내 곁에 와줄 거지, 그렇지?'라는 가사가 과몰입을 부른다.
보영과 아휘의 너덜너덜한 연애가 내 마음에 들어온 것도 그래서였을까. 잠시 함께 있고 매번 이별하기를 반복하며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다신 날 찾지 마' 이야기하게 만든 지긋지긋한 연인이지만 피를 흘리며 찾아왔을 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아줄 수밖에 없다. 네가 증오스럽지만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너를 내치지 못하는 내가 싫지만 어쩔 도리 없이 나는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
다친 보영을 보살피는 아휘의 모습에서는 묘한 안정감과 그로부터 파생된 약간의 긴장과 불안이 느껴진다. 아픈 아휘에게 밥을 해달라고 보영이 조르자 아휘는 '너도 사람이냐'며 소리를 지르지만 바로 다음 장면 담요를 두르고 창백한 얼굴로 볶음밥을 하고 있다. 그런 아휘의 마음은 "그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다. 아픈 그와 있을 때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라는 대사를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네가 다쳐서 내가 돌봐줘야 하는 상황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관계, 이런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보며 위안을 얻게 되는 슬픈 순간이 누군가에겐 있었을 것이다.
보영은 몸이 낫자마자 여권을 찾는다. 숨겨둔 여권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아휘에게서는 절망이 느껴진다. "네 목소리를 들으면 지금 네가 불행한 게 느껴져." 아휘에게 이야기하는 장의 대사를 들으며, 내 목소리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숨겨지지 않는 그 소리를 자세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이 이미 주변에 있다면 더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다.
"네가 싫어. 제멋대로 구는 것도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도 지쳐. 네 곁에 있는 게 지긋지긋해. 그만 헤어지자." 삶이 계속되어야 하므로 끝내야 할 것 같은 관계들이 있다. 나는 원하지 않는 것을 네가 간절히 원할 수도 있고, 나의 바꾸기 어려운 어떤 특성들이 너를 지속적으로 지치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관계가 수명이 다 했을 수도,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위해, 고통스럽더라도 관계를 끊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삶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알더라도 구태여 고통을 감내하며 이별할 필요가 없다. 당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서로를 깊이 안으면 된다.
마음이 아파서 그런 가정을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