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주는 망상, 그 망상이 주는 희망
어머니와 우린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버지와 살던 그 지옥 같던 집에서 나왔다. 부유하게 살던 삶을 버리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빌라에서부터, 백 평이 넘는 큰 마당이 있는 집으로 오기까지 10년. 이 모든 것을 이루신 어머니는 참으로 악착같은 삶을 사신 분이다. 지옥 밖에서 그녀의 행복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그녀 앞에서 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꼭꼭 숨길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 신경도 안 쓰던 그 사람. 폭력적이고 제정신이 아니던 그 사람. 출장을 가정하에 자식 대신 젊은 여자애들이나 품에 부둥키며 살던 그 사람. 특별히 우릴 신경 쓰거나, 놀아주거나, 다정하게 대해 준 적 없던, 우리에게 드는 급식비조차 아까워하던 그 정 없던 사람에게서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함을 느꼈던 짧은 찰나의 순간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천재, 영재 소리를 듣던 내 쌍둥이 오빠에게 무시를 받는 건 꽤 어렸을 때부터의 나의 일상이었다. 모르는 걸 물어보던 7살 여자 꼬맹이에게 그것도 모른다고 그거 하나 이해 못 하냐며 바보라며 놀리던 그녀의 쌍둥이 오빠,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였던 나. 그걸 들어버린 아버지가 성큼 다가오더니 "누가 바보야, 우리 유라(가명)도 똑똑해. 하면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그렇지?" 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날 한번 보시곤 오빠에게 화를 냈다. 지옥을 나온 그 이후로는 쌍둥이 오빠가 나를 무시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감싸주며 쌍둥이 오빠에게 꾸중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도 잘 할 수 있는 아이다, 라고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날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닌 내가 못된 사람이며 미움받을 짓만 한다고 하셨다.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해서 속 썩이는 일이 없는 오빠를 천사처럼 생각했다. 그런 천사를 화나게 하는 난 내 의지와 다르게 못된 사람이 되어있었다. 엄마의 그 천사라는 사람이 내 머리에 책을 던져도, 의자를 던져서 의자가 부서져도. 내가 못된 사람이고 잘못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우리는 아버지와 살지 않기 때문에 더 행복한 삶을 사는 거라고 하셨다.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나도 악마 같던 아버지 곁을 떠나 살던 그 삶이 이미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행복은 내 일상과 거리가 멀었다. 분명 지옥에서 나왔는데, 그곳보다 더 괴롭고 힘든 이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자신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풀어버리는 우리 집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었다. 매일 화장실에서 소리 내지 않고 울던 나날들뿐이었다.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울 때 소리를 내면 더 맞곤 했다. 가끔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지옥에서 나와서 생각나는 게 악마 같은 사람이라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특히나 엄마가 말하는 그 천사 같은 사람에게 무시 받거나, 천사가 던진 책에 머리를 맞아서 울던 날이나, 천사 편을 들어주며 설명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해서 천사를 짜증 게 한 네 잘못이라며 천사가 얼마나 착한데 화나서 그랬겠니, 라고 방관하던 어머니나. 별것도 아닌 이유로 훈육이랍시고 당연시되던 학대, 소리 내서 울면 더 격해지는 학대. 난 미움 받을 행동을 하고 그런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엄마, 내 방 밖으로 들리는 온갖 나에 대한 욕설들. 그런 일상에서 나도 잘 할 수 있다며 편을 들어줬던 모두가 악마라 부르던 그 사람이 생각났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누가 정말 악마인 걸까? 이 천사는 정말 천사인 걸까?...'
어느 날은 아버지에게 보낼 긴 메시지까지 적어본 적이 있었다. 7살이던 나에게 나도 충분히 똑똑하고 잘 할 수 있다고 믿어줘서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 그렇지만 그 메시지를 전송한다는 뜻은 나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택하고 자식은 신경도 안 쓰는 그와의 삶을 택하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메시지는 양육권 문제를 불 지피는 씨앗이 될 테니까. 아쉽게도 그는 정말 자식 신경 하나 쓰지 않는 사람이 맞았다.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서 며칠 가출했을 때 우리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아버지는 우릴 신경 쓰지조차도 않아 우리 스스로 머리를 감다 보니 깨끗하게 제대로 감지도 못했고, 어머니 대신 잠시 집에 오신 외할머니가 우리의 머리를 헹궜을 때는 검은 찌든 물이 나왔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 어느 쪽이든 나에겐 다 지옥이었던 것 같다. 어느 쪽도 더 행복한 쪽은 나에게 없던 것 같다. 그건 나이가 든 지금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아버지와 쌓지 못한 관계에서 오는 이 공허함을 채우고 싶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와 하고 싶었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며 다양한 남자들과 사랑을 했다. 아무리 누군가를 만나가며 사랑해도 이 마음을 채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다. 어렸을 땐,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그런 마음이 채워질 거라 믿었는데, 특히나 딸과 아버지 사이에 형성하지 못했던 애착 관계를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른 남자와의 사랑으로 채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도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딸이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되고 싶었고, "나 잘했어요?" 자랑하며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은 딸이었고, 이거 아버지가 좋아하겠다, 신나는 마음에 두 손 잔뜩 뭔가 사 들고 가서 아버지를 웃음 짓게 하는 그런 딸이 되고 싶었다. 나를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아버지란 사람이 나 때문에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연히 딸들에게 다정한 아버지들을 보면, 난 상상 속에서 그를 만나곤 한다. 그곳에서의 그도 저 다정한 아버지들과 같은 말을 하며, 저 사람들과 같은 따뜻하고 사랑 잔뜩 담긴 눈빛으로 나를 대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마음이 시큰거린다. 아, 눈물이 흐르고 있구나. 슬픈 건지, 그리운 건지, 위로받은 느낌인 건지, 우리 아버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건지 아니면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아버지가 날 저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인 건지. 아버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들의 콘서트 DVD나 뮤직비디오를 우리 집 영화관에서 틀어주시곤 했다. 그가 좋아하던 <My Love - Westlife>,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할 때도 늘 듣곤 했다. 오늘 우연히 그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봤다.
'맞아, 모허 절벽이 이 뮤직비디오 촬영지였지. 내가 아일랜드의 모허 절벽에 갔을 때 아버지한테 사진을 찍어서 보내드렸으면 참 좋아하셨을 거 같은데...'
아버지는 내가 보낸 사진을 보시곤 정말 좋아하셨다. 남들에게 평생 천재 소리 듣고 사시는 그는 자신이 가진 풍부한 지식이 잔뜩 든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다니곤 했는데, 오늘은 내가 보내드린 모허 절벽의 사진을 보셔서 그런지, 보따리에서 모허 절벽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보따리에서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걸 참 좋아했었다. 그는 자기 지식과 이야기를 남들에게 나누는 것을 참 좋아하시곤 했다. 그러고 그는 또 사라졌다. 그 이유를 깨달았다. 더 상상해보기엔 아버지와 딸은 어때야 하는 건지 난 모른다는 걸. 나와 아버지는 어땠더라. 큰 곰 인형이 무척이나 갖고 싶었던 내가 잠든 새벽에, 잠깐 깬 실눈 틈으로 보인 건 그가 내 품에 큰 곰 인형을 조심스레 두고 가는 모습이었다. 얼마 있지도 않은 과거의 기억을 몇 번이나 봤으면 이렇게나 선명할까. 지금 내 옆엔 아직도 어릴 적 그가 내게 어린이날 선물로 준 큰 곰돌이 인형이 있다. 그의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내게 이런 상상을 보여주고는 사라진다. 현실은 이 상상이 망상임을 내게 알려준다. 참,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눈물이 괜히 또 그 씨앗에 싹을 틔운다. 그렇게 또 희망이 자란다. 그 상상 속에서 우린 또 행복한 딸과 아버지가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