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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님 Dec 01. 2021

면접을 생전 처음 보는거지요?

첫 면접 (고 박원순시장님과의 몇몇 기억)

‘면접을 생전 처음으로 보는 거지요?’


2005년 여름 어느 날, 안국동 아름다운가게 사무실 3층 회의실에서 국장과 간사들과 함께 면접을 진행하던 박원순 당시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이하 박원순 시장님으로 호칭 통일)는 나에게 웃으며 질문을 했다. 하긴 나로선 1990년도에 창업을 해서 2005년 초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 계속 한 회사의 대표를 하고 있었던지라 취직을 하기위한 면접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걸 잘 아는 박원순 시장님은 어색한 면접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그 질문을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그날 나는 그 면접에 합격을 해서 그 후로 1년여 동안 아름다운가게 간사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실 나와 박원순 시장님과의 인연은 그로부터도 더 오래전인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1985년 서울미문화원 사건으로 구속이 되었을 때 당시 박원순 변호사도 변호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교도소 안에 있었던 나로서는 직접 뵐 기회가 없었지만 바깥에서 민가협(민주화가족협의회) 활동을 열심히 하셨던 어머니 말씀으로는 민가협사무실 혹은 거리의 농성장에서 박원순 변호사를 거의 매일 만났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박원순 변호사는 젊은 변호사로 부산 미문화원사건, 부천 성고문사건 등 굵직굵직한 인권사건을 맡았었고 명단에 이름만 올린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리 정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 어머니는 그 후 박원순 변호사를 무한 신뢰했고 어머니들의 투쟁에 감동한 박원순 변호사도 나에게 항상 어머니의 안부를 먼저 물어보시곤 했다.


나는 아름다운가게에서 특수사업국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조직의 책임자로서 1년여 동안 일을 했다. 특수사업국이란 박원순 시장님이 직접 작명한, 소위 공정무역, 업사이클링 사업 등 그동안 아름다운가게가 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조직이었다. 나는 당시 전직(?) 사업가로서 아름다운가게가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기업으로서 가치창출구조와 조직 내에 기업가정신을 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시장님이 요구하신 특수사업국 일을 나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가게는 이윤추구가 주된 목적인 기업이라기보다는 시민운동단체였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데는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한계를 느낀 나는 결국 목발을 집고 보낸 아름다운가게 생활을 1년여 만에 서둘러 마치고 다시 본업인 벤처업계로 되돌아 왔다.


‘장. 영. 승? 그 자유로운 영혼이 할 수 있겠어요?’


아름다운가게를 그만 둔 후 나는 다시 벤처업계로 돌아와서 작은 투자회사를 창업하여 경영했다. 하지만 힘이 들어 다시 매각하고 그냥 어떤 재벌기업 통신사의 자회사의 전문경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월급쟁이 대표이사 생활을 10여 년 동안 하다 퇴직을 했고 인생 2막을 준비하기위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에 입학을 했다. 그 사이에 박원순 시장님은 서울시 시장이 되었고 몇 년 후 2014년 세월호 사건이란 슬픈 일이 생겼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에게도 그 사건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고 내 삶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면서 서촌갤러리라는 작은 갤러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갤러리는 세월호 사건이 생기자마자 일반 전시를 멈추고 세월호 아이들의 평범한 꿈을 알리고 함께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그 서촌 갤러리에서 박원순 시장을 10여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14년 7월의 더운 어느 날 박원순 시장님은 항상 그랬듯이 배낭을 메고 조용히 나타났다가 그림을 감상하신 후 조용히 사라지셨다. 그 후 나는 세월호 아이들을 잊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꿈이룸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영등포구에 만들었고 학교 재정확보를 위한 작은 회사를 만들어 돈을 벌기위해 분투 중이었다. 그러다가 2018년 4월 어떤 지인으로부터 서울산업진흥원의 대표에 응모를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아 사양을 했다가 고심 끝에 결국은 9월경 응모를 하였다.


서류를 준비하고 업무수행계획서를 작성하면서도 사실 자신은 없었다. 전과자에 실패한 경영자가 감히 공공기관장에 응모를 한다는 것이 언감생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류심사와 임원추천위원회의 면접심사 끝에 마지막 두 명의 후보 중에 포함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후보자 중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시장님이 ‘제가 아는 장영승이요? 그 자유로운 영혼이 할 수 있겠어요?’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고 ‘역시 떨어졌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자정이 다되어 시장님이 고심 끝에 사인을 하셨다고 인사비서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신들 돈이면 이렇게 하겠어요?’


서울산업진흥원에 부임을 하자마자 1주일 만에 서울시의회 행정감사를 받았다. 업무를 파악하기는커녕 내 개인PC 세팅도 하기 전에 감사를 받느라 애를 먹었는데 행정 감사가 끝나자마자 이번엔 시장님이 서울산업진흥원이 운영하고 있는 어떤 시설에 오신다고 해서 부랴부랴 시장님을 맞이하러 나갔다. 박원순 시장님께 임명장 받고나서 처음으로 뵙는 자리였는데 그 시설을 둘러보시고 몇 가지 질문을 하시더니 대뜸 나에게 ‘당신들 돈이면 이렇게 하겠어요?’ 라고 화를 내셨다. 시민의 소중한 세금이 꽤나 투입되었는데 성과가 미흡한 것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자 앞으로 내가 맡았으니 잘하라는 분명한 요구였다. 그런데 그날 현장 분위기가 꽤나 살벌했는지 그날 함께 방문한 서울시 공무원들 여러명이 그날 저녁 나에게 위로의 전화를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걱정 마세요. 시장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저는 잘 알아요!'라고 말했다.


‘바로 옆에 서울메이드 매장을 내세요.'


나는 그 후로 꽤나 열심히 일을 했다. 회사에 제일 먼저 출근했고 제일 나중 퇴근했다. 주말도 없었고 내 소유의 회사를 경영하듯이 하루 24시간 일 생각만 했었다. 서울산업진흥원이란 곳은 참으로 많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일을 하려고 들면 과로사 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특히 부임 첫해 시장님이 서울산업진흥원에 방문하셔서 중소기업제품의 해외유통을 위한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셔서 ‘서울메이드'라는 브랜드를 만드는데 집중을 했고 1년도 안되어 브랜드를 론칭하였다. 그리고 2019년 7월 어느 날, 서울메이드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행사를 위해 베트남 하노이에 출장 중이었는데 시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제가 남미에 순방을 가는데 수행으로 따라 오세요. 우리 중소기업제품을 남미에도 팔아야 할 것 아닙니까. 순방 팀에게 이야기 해놓을테니 곧장 멕시코로 오세요.’


결국 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멕시코로 날아가야 했다. 멕시코에 도착을 했는데 서울시 수행원들이 졸지에 멀리까지 불려온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막상 와서 상황을 보니 시장님이 나를 급히 부를만한 이유가 있었다. 각 정상들과 회의에 항상 경제와 스타트업 생태계는 주된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 옆에서 보좌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관련 회의는 멕시코, 콜롬비아 메데진, 보고타에서 연일 이어졌고 그 나라 정부 관료들은 서울의 산업과 창업 생태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때마다 박원순시장님은 그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고 회의가 끝나면 항상 나에게 숙제를 남겼다.


그리고 남미에서의 한류는 대단했다. 멕시코 길거리에서 KPOP을 부르며 춤을 추는 젊은 아이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았고 청년들은 서울메이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나에게 지난 월드컵 축구이야기를 하며 고맙다고 반겨주었다. 마침 콜롬비아의 어느 대형 공연장에서는 K POP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깜짝 방문한 박원순 시장님을 보고 수천 명의 콜롬비아 청소년들은 마치 한국의 아이돌 스타에게 환호하는 것처럼 열렬히 맞이 해주었다. (꽤나 감동하셨던지 1년 내내 그 말씀을 하시며 그런데도 그 나라에 한국 중소기업 물건을 왜 못 파느냐고 타박 하셨다. 그 다음날 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발견한 무무소라는 한국제품 짝퉁들을 판매하는 중국 매장에 대한 보고를 드렸더니 대뜸 말씀하셨다. ‘짝퉁 중국매장 바로 옆에 진짜가 나타났다라고 하고 서울메이드 매장을 내세요.’


‘결자해지 하세요.’


을지로 롯데백화점 건너 프랑스 밀랍인형을 전시하고 있었던 그레뱅뮤지엄이라는 곳이 서울시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19년도 말이었다. 중국의 사드보복때문에 중국 관광객이 줄어 뮤지엄 경영이 악화되어 서울시에서 골치아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 공간이 바로 나와 박원순 시장을 만나게 해준 한때 미국문화원였기때문이었다. 원래 그 공간은 미쓰이물산이라는 일본기업이 1937년도에 사옥으로 지은 공간이다. 그런데 일본이 물러나고 공간을 미국이 차지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미국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가 미국문화원이 옮기면서 프랑스 밀랍인형을 전시하는 민간 전시업체에게 대여가 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연이 많은 공간을 복원하고 새로운 가치를 담아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20년 초 시장님께 새해 사업계획을 보고 드리면서 그 제안을 했다. 잠시 생각하시더니, ‘하하. 인연이란 참. 장대표가 결자해지 하세요.’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를 설득하여 작년 5월경 추가경정 예산을 확보하였고 현재 서울산업진흥원이 운영, 관리하는 공간이 되어 올해 개관을 앞두고 있다.


‘당신들을 믿습니다.’


박원순 시장님은 내가 어려울 때 항상 옆에 계셨으며 또 다른 삶을 살게 한 기회를 주신 분이다. 나는 아직도 박원순 시장님이 떠나셨다는 것이 실감이 안 된다. 아직 내 전화기 텔레그램에는 박원순 시장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고 시장님이 지시하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한마디로 나는 아직 박원순 시장을 추모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특히 박원순 시장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앞서서 이 허접한 글을 쓰는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박원순 시장님이 나에게 혹은 공식 회의석상에서 자주 하신 말씀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 제가 당신들을 믿고 맡겼습니다. 시민을 위하는 것이라면 절대 굴하지 말고 소신껏 하세요. 기존의 규칙은 깨도 좋습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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