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돌, 길 9
고3이 되자 학교는 점심시간을 없앴다. 밥을 먹고 나면 둘셋씩 팔짱을 끼고 운동장 트랙만 빙빙 돌던 아이들은, 이제 분주히 양치하고 자리에 앉아 영어 듣기 문제를 풀어야 했다. 하지만 볕을 쬐며 마음 편히 쉴 유일한 시간을 그렇게 버릴 순 없었다. 견디지 못하고 나는 이탈했다. 문제집을 준비하지 않고 시작종이 울리기 전 슬그머니 나갔다. 그리고 각 반을 순회하는 감독 교사를 피해 빈 교실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
어느 하루는 나처럼 그 시간을 싫어한 친구를 데리고 갔다.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걔는 자기가 좋아하는 팝송을 불러주겠다고 했다. 한 층 전체의 침묵 너머로 원어민의 유창한 발음이 울려 퍼지는 동안 친구의 노랫소리가 들킬까 걱정스러웠다. 다음 문제로 넘어가며 생기는 정적을 피하기 위해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잠깐만, 지금 땡땡이치는 거 맞아?” “문제 풀 때보다 더 열심히 듣는 것 같은데.” 진지하게 타이밍을 고려하던 우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자주색 커튼 사이로 비추는 한낮의 스포트라이트 아래, 친구는 이렇게 노래했다. “Hit the road, jack. Don’t you come back no more.” 떠나버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 노래 속 연인이 다투며 하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내게는 망설이지 않고 벗어날 용기를 주는 주문으로 들렸다. 수업 중에도 책상 위 내려앉은 투명한 햇빛에 눈이 부셔 찡그리면서도 자꾸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답답한 숨을 내쉬며 빨리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여기가 아닌 바깥을 향한 상상, 그게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지만 돌이켜보면 어렴풋이 피곤함만 남아있다. 하지만 그때 그 교실에서만큼은 우리가 온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미래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에 머물기 위해 있었다. 의미 없는 소음과 구분되는 노랫말이 텅 빈 공간을 메우고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었다.
볼더링장의 배경음악은 주로 음원차트 TOP 100이다. 좋아하는 곡이 아니면 은은하게 깔린 노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마감 시간까지 머물던 밤, 갑자기 스피커가 뚝 꺼졌다. 한순간 내부가 고요해지자 알았다. 음악이 없다면 무서울 정도로 조용하겠구나. 넓은 실내에서 혼자 벽을 보고 몰입하는 운동이라 간간히 응원하는 소리나 낮은 말소리 이외에는 소음이랄 게 없다. 그럼 들려오는 가사나 멜로디가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더 멀리 손을 뻗고 훌쩍 뛰어오를 용기를 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거침없이(부석순)_ 거침없이 난 걸어가지/ 거침없이 난 달려가지/ 거침없이 난 날아가지
코디 문제 풀 때 필요하다. 홀드 여러 개를 밟아 허공을 뛰어야 할 때, 망설이지 않겠다는 과감한 의지를 다져본다. 한 번만 들어도 뇌에 ‘거침없이’가 각인될 정도로 반복하니 자연스레 자신감이 충전된다.
오르트 구름(윤하)_ 오로지 나를 믿어/ 지금이 바로 time to fly/ 두 눈앞의 끝, 사뿐 넘어가/ 한계 밖의 trip, 짜릿하잖아
안 될 것 같았는데, 여기까지가 나의 끝인 줄 알았는데, 막상 선을 넘자 느껴지는 쾌감을 윤하만의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어떤 음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벅차고 몸이 가벼워지게 만든다.
일어나(김광석)_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여린 싹이 흙을 밀고 지상으로 올라오듯 힘차게 일어나야 다음 홀드에 닿는다. 넘어지고 떨어져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 이렇게나 단순하고 직관적인 문장들이 나를 부축한다.
질풍가도(유정석, 쾌걸근육맨 2세 ost)_ 한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질풍은 ‘몹시 빠르고 거세게 부는 바람’. 나를 막아서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하늘을 가르는 거센 바람이라니. 어느새 따라서 흥얼거리는 가사에는 희망찬 확신이 숨겨져 있다. 담대하고 명랑한 응원가다.
I ain’t worried(onerepublic)_ I ain’t worreid ‘bout it right now
머릿속으로 경로를 계산하기보다 생각은 비우고 걱정을 지운 채로 움직일 때 훨씬 수월하게 갈 수도 있다. 경쾌한 휘파람으로 시작되는 멜로디에 몸을 맡겨보자. 난 지금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