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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ff Jung Mar 17. 2024

명멸하는 유도등을 따라가세요

Kent [Isola]

‘…..석 밑에 두시고, 선반 속에는 가벼운 물건을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딩동.’


감고 있던 눈이 부옇게 밝아오는 빛에 반응한다.

‘아함, 여기는 어디지?’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며 주변을 돌아보는데 무언가 익숙한 풍경이다. 주변의 좌석들과 등받이에 들어 있는 팜플랫, 안내 책자. 깔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이들이 천천히 지나가며 자리를 검사하고 있다.

‘왜 내가 기내 안에 앉아 있는 거지?’


‘딩동.’

‘손님 여러분, 여러분의 여행길을 Kent 항공과 함께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 비행기는 Superunkown으로 가는 Kent 항공 747편입니다. 목적지까지의 비행시간은 이륙 후 여러분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안전운전을 책임지고 있는 기장과 사무장, 그리고 객실 승무원 모두는 여러분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손님 여러분, 좌석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고, 화장실을 비롯한 기내 모든 곳에서 흡연을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는 안전운항에 영향을 주는 전자기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휴대용 전화기의 전원을 꺼두시기 바랍니다.’


‘Ladies and Gentlemen. Welcome to kent…..’


 ‘뭐야. 난 비행기를 예약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갑자기 여기로 오게 된 거냐고.’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봐도 모두 태평한 얼굴이다.


“어어, 여기 여기요. 잠깐만요.” 급하게 일어나서 항의하려고 하는 그를 승무원이 제지하며 다시 자리에 앉힌다.

“손님, 잠시 후 이륙하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된답니다.”

“아니,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저 지금 내려야겠어요. 지금 저를 찾는다고 난리가 났을 텐데.”


잔뜩 황당함에 붉어진 얼굴을 승무원은 익숙하다는 듯 미소를 띤다.

“손님, 자신도 모르게 여행을 떠나셨나요? 자의든 타의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여행을 떠나셔야 한답니다. 아마 여행일정이 갑자기 결정되었나 보네요.”

웃음을 띠면서 진정시킨다.

“아니, 웃을 게 아니고요. 진정하고 자시고 가 아니라 이게 지금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자꾸 일어서려는 그를 승무원은 다시 바로 앉히고는 버클을 강하게 채워 버린다.

“나를 분명 찾으려고 할 거요. 내가 지금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내 지금 통화할 테니 잠깐만 있어 봐요.”

“현재 항공기는 이륙을 앞두고 있습니다. 손님. 휴대폰의 전원은 꺼 놓도록 하겠습니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그의 휴대폰은 승무원에게 낚아채여 전원이 꺼진다.

“손님 괜찮습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켜 보세요. 당신의 과거를 찾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어요.”



지지직…

“Ground / Kent747 / Request Taxi”

“Kent747 / Taxi to holding point Runway 32R / Via Papa4”

“Taxi to holding point Runway 32R / Via Papa4 / Kent747"

관제탑과 기장 간의 무선으로 항공기는 이미 활주로로 이동하고 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문득 옆을 바라보니 평온한 얼굴의 한 중년 부인이 앉아 있다. 얕은 흥분으로 붉그스름해진 얼굴은 분명 이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눈치다.


“저기, 제가 여기 왜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여기 이게 뭡니까. 이게 갑자기 눈 떠 보니 비행기 안인데요.”

“아, 그런가요?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군요. 저는 항상 기대했었던 비행이라, 댁과는 좀 다른 것 같네요. 많이 당황스러우신가 봐요.”

“저를 찾는 사람이 없다니, 제가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루아침에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요. 저 좀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하죠.”

“비행기 출입구는 이미 닫혔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요. 단지, 모두가 염원을 해야 비행기는 이륙을 할 수 있다니까 꼭 집중해 주세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공기는 육중한 몸을 이끌어 활주로를 활강하고 있다. 동그란 창밖을 보니 칠흑 같은 어둠이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둠 속 간간히 빛나는 활주로의 빛이 보인다.


안내 방송이 다시 흘러나온다.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이륙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비행기는 여러분의 염원으로 이륙이 가능합니다. 풀 파워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다시 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습니다. 명멸하는 유도등이 여러분을 지속적으로 안내할 겁니다. 수많은 잡음이 몰려올 것이나 걱정하지 마세요. 그 유도등을 계속 따라가세요. 색깔이 각기 달라 헛갈릴 염려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유도등은 자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Cabin Crew, Ready for take off.’


'유도등이라고? 유도등…. 유도등을 내가 알 수가 있다고?'

이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는 삽시간에 고요함으로 물든다. 단단하게 매어진 버클과 꺼진 핸드폰, 주변에 아무도 없이 그 혼자만 남겨져 있는 것 같다.


지지직. 관제탑의 마지막 신호가 울린다.

“Kent747 / Wind 270 at 10 / Maximum 18kt / Runway 32R / Cleared for take off”

“Cleared for Take off / Runway 32R / Kent747”


기장은 이륙 허가를 복창하고는 잠시 호흡을 두더니 이내 조종간의 스로틀 게이지를 힘 있게 올린다.

거대한 제트엔진이 으르렁거리는 듯하다 갑작스럽게 최고 파워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일시에 좌석시트를 파고들어 간 몸은 온몸으로 속도를 느낀다. 흔들거리는 진동과 정신이 혼미한 사운드에 이리저리 몸을 맡기고 있는 와중에 여전히 이게 뭔가 일말의 의심이 피어오른다.

‘이거 기분 나쁜 꿈이겠지?’


“집중하세요. 명멸하는 유도등을 따라가세요. 당신의 유도등을 따라가세요.”

“유도등이라니, 어디에 있다는 거야. 난 잘 모르겠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 건 없었다고!”

“다 흘려버려요. 눈을 감고 집중해요. 지금 속도를 느끼며 앞을 집중해요.”


가속도가 더욱 붙는다. 관성을 이기고 달리기 시작한 항공기의 거대한 무게가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이젠 멈출 수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공허를 느껴요.”

“나를 안아요.”

“활주로의 끝은 절벽이에요!”


순간, 잠깐 빛나는 빛이 스쳐 지나간다.

‘어, 이건가. 이 색인가?’ 빠르게 스치우는 활주로의 유도등처럼 깜박이는 빛이 스친다. 허나 이내 다시 사그라진다.

‘집중해, 집중하라고.’ 눈을 감고 앞으로 펼쳐져 있는 라인을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한다. ‘저것인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푸르스름한 빛.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는 몸의 긴장감을 부채질한다.  

‘이 빛인 것 같아.’ 헝클어진 마음속에서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는 이 명멸. 깜박 깜박 깜박 깜박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인을 잡아.’

“We ran out of time, Leavin' all behind!”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빛의 라인이 한순간 하얗게 펼쳐지는 그 찰나, 조종사가 레버를 힘껏 당긴다.

“지금이다.”

육중한 동체가 기우뚱하며 순식간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날개를 밀어내던 양력이 거대한 중력을 이기는 순간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된다. 토해내는 굉음이 모든 것을 뚫고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렇게 커다랗던 모든 것들이 조그맣게 변하더니 이내 깨알 같은 점으로 바뀐다. 그리곤 그 마저도 어둠 속으로 허망히 사라져 간다.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간 듯하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씻으며 이게 뭔가 하다가도 절벽에 떨어지지 않고 이륙했다는 생각에 약간의 안도감도 든다. 이륙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내는 온통 조용하기만 하다. 떨림도, 그 소음도, 긴장감도 일시에 소거되었다.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방금 본 그 푸른 빛을 떠올린다. 분명히 그는 알았다. 그 깜박이는 빛을. 그 빛이 자신만을 위해 라인을 그려준 순간을.


‘딩동.’ 문득 표시등이 꺼지며 안내 방송이 나온다.

‘안녕하십니까 본 비행편의 기장입니다. Kent747편이 안전하게 이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손님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현재 우리 비행기는 고도 3만3천피트를 시속 400마일로 순항 중이며 시간은 01:45분입니다.

방금 좌석 벨트 표시등이 꺼졌습니다. 비행기가 갑자기 흔들리는 경우도 있으나 좌석 벨트를 매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목적지까지 자리에 앉아 끝까지 좌석 벨트를 매셔도 되고, 자유롭게 이동하셔도 좋습니다. 원하신다면 비상구 문을 열어 탈출하셔도 좋습니다. 패러슈트는 좌석 아래에 있으며 스트랩을 당겨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이제 기장과 저희 승무원은 여러분을 안전하게 이륙시켜 드렸으므로 탈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시는 목적지까지 편안한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승무원들은 신속하게 자신의 패러슈트를 들러매기 시작한다.


“아니, 승무원님,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탈출한다니요?”

“네, 손님. 이 비행기는 안전하게 이륙하였으므로 저희들의 소임은 끝났습니다. 자유롭게 이동하셔도 되며 편안한 여행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럼 누가 이 비행기를 몬단 말입니까.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의 초조함을 뒤로 두고 비상구는 이미 열린다. 세찬 찬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장이 새처럼 우아하게 다이빙하는 것을 필두로 승무원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익숙한 몸짓으로 허공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승무원이 난간을 부여잡고 잠깐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윙크를 한다.

“당신은 이미 명멸하는 유도등을 보았어요. 따라가세요.”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순식간에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Kent 켄트 [Isola] 섬 1997년 <747>

https://youtu.be/ON8Wcgy9S1s?si=U9ycoi_vbJ8NVz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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