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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없는 바다 May 11. 2023

로컬스티치 통영 - 1일 차

통영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통창 바로 옆의 자리라 요즘은 11시만 돼도

태양이 정수리쯤에 있어 햇빛에 자리가 후끈하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서는 잠이 쏟아지는데

주체하지 못하는 식곤증을 숨겨보려

의미 없는 마우스질만 위아래로 하고 있었다


나보다 늦게 점심을 먹고 들어온 연두가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었다


들어보니 사정은 이랬다

로컬 스티치 통영에서 워케이션 체험단을 모집했고,

일단 다 재껴두고 신청서를 냈고, (꽤 간절하게 썼다고 했다)

그런데 당첨돼버렸고!


사실, 워케이션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진짜로 워케이션을 보내주는 회사는 드물고.

그래서 연두는 당장에 본인이 갈 수 있을지,

또 같이 갈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 난감했던 것이었다


연두가 말을 마치고 나와 정적 속에서

3초 정도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오드리 일단 숙소 한번 봐볼래요?"


연두와 나는 갑자기 어디에서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한번 가봅시다!로 결정을 했고

리드한테 둘이서 동시에 휴가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리드가 어떤 표정으로 오케이 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다시금 되돌아보니까 조금은 떨떠름했던 것 같기도.

근데 아무튼 그때는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통영 버스를 예매해 버렸다


그때는 서로 말 안 했지만

우리 둘 다 스스로에게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서울고속버스 터미널을 몇 년 만에 가보는지.

분명 내 기억 속에는 침침하고 쿰쿰한 느낌이었는데

너무나 세련되어져 있어 낯설었다


통영 가기 전날 자취방 이사를 했고

게다가 예기치 못하게 과음을 해서

아침에 부랴부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배낭에 쑤셔 넣고 나왔다


버스에 타고 나서야 지도에 서울부터

통영까지를 한번 찍어봤다


되게 멀더라, 끝에서 끝을 가는 거였다

그제야 버스에서 보낼 4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온 세상이 알록달록

연두 아버지가 알록달록 토마토를 싸주셨다

정말 맛있었다. 스테비아 토마토 같이 달았다

스테비아 토마토도 알록달록한 색깔로 팔았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서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연두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좌석 의자가 어찌나

푹신하던지 잠들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방송이 나오길래 깼다

아 대전쯤 왔나?

그런데 통영에 도착했다고 했다


이게 뭐지?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수인분당선에 바짝 낀 채로

한 시간 반 동안 출근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욱여넣어

가방이 터질 듯 무거워도

4시간 통영 가는 길이 훨씬 쉬웠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통영이 멀어서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통영은 지도에서 보이는 것보다 가까움!


구석구석, 알록달록 로컬 스티치 통영!



도착 직전까지 너무 바빠서 혹은 그냥 성격 자체가 느긋해서

아무런 계획 없이 왔더라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첫 번째 이유는 로컬 스티치의 공간을 하나씩 뜯어보기만 해도 첫날이 사라지고

두 번째 이유는 문득, 갑자기 하고 싶은 일들이 마구마구 떠오르기 때문이다


로컬 스티치 통영의 전신은 극장이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극장이었다가 다시 얼마간 은행이었다가

지난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을 왕창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 올린 것이 아니어서

예전의 모습이 구석구석 남아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오티 장소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는데

자줏빛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계단이

오래된 오페라 극장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터라

건물 이야기를 듣고서 신기했다



건물의 중간은 뻥 뚫려 있어서 천장이 하나인데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어서 2층에 들어선 순간

하나의 거대한 온실 또는 방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 한낮이어서

해가 건물 안 구석구석을 비출 정도로 강했다


지내는 동안 날씨가 계속 맑았는데,

비가 왔다면 천장에 어떤 소리가 들릴지 궁금했다


객실은 제비 뽑기였고 내가 뽑은 방은

건물의 제일 끝방이었다



객실 문을 열자마자 나랑 연두는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정말 말도 안 되게 예뻤다


포스터, 책상, 의자, 침대

모든 가구와 소품 천장과 바닥이 감각적이어서

당장에 맥북을 꺼내 뭐라도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한 층 더 올라가 보니 이케아 쇼룸에 있을 것 같은 주방이 나왔고

그 뒤로는 바다가 전면으로 보이는 자리들이 있었다


우리는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건물을 한참 동안 뒤적거렸다


기사님 요즘 뭐가 맛있어요? 도다리쑥국.


통영 버스 터미널부터 로컬 스티치까지 택시로 15분 정도이다.

택시 안에서 점심 먹을 곳을 찾아보았는데

네이버에 검색하면 할수록 도무지 고를 수가 없었다


"기사님 요즘 통영에서 뭐가 맛있어요?"

"도다리 먹어야지. 도다리 쑥국. 아니면 세꼬시"

"아 도다리가 철이에요?"

"어디에서 왔어요?"

"서울이요!"

"서울 아가씨들이 세꼬시 먹나 모르겠네"


나는 세꼬시 좋아하는데 연두가 좋아하는지는 몰라서

일단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연두는

도다리쑥국집을 찾아냈다

메뉴판에 도다리쑥국이 없지만

주문은 가능한 왠지 단골만이 알고 있는

히든 메뉴 같은 곳이었다


도다리 쑥국집은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고

건물을 구경할 때는 몰랐는데 정신 차리고 나니까

엄청나게 허기가 진 상태였다




누가 봐도 이 식당에 처음 오는 사람들인데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주문하는 게

어딘가 머쓱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도다리 쑥국 2개요 라고 말했다


진정한 맛집은 반찬 때깔부터 남다르다

젓갈이랑 이름 모를 나물을 먹을 때부터

나와 연두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제 예기치 못하게 과음을 했던 게

사실은 이 국물을 마시기 위한

필연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깃밥 한 개를 더 시켰는데

계산할 때 할머니가

손녀 같다며 계산에서 빼주셨다


통영의 이방인에게

이런 친절은 치사량이다


후식으로 꿀빵을 사러 가는 길에 연두한테 물어봤다

연두도 세꼬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일 저녁으로는 도다리 세꼬시를 먹기로 다짐했다


퀴즈 : 그 누구도 못하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첫날 저녁에는 이번 체험단에 선정된 인원끼리

함께하는 식사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자리를 기피하지는 않지만 즐겨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라운지의 직사각형으로 긴 식탁에 모두가 둘러앉았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음식들의 포장을 뜯고 배분했다


로컬 매니저님들의 맛집에서 공수해 온

통닭, 충무김밥, 꿀빵, 꽈배기들로 식탁이 북적거렸다


느낌이 왔다 

저녁 식사 전에 한 바퀴 돌면서 자기소개할 거라 는 것

아마 모두가 음식 포장을 뜯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나는 연두 뒷차례여서 연두의 답변을

래퍼런스 삼아 나를 소개할 수 있었다


나는 온라인 교육 플랫폼의 1년 차 마케터로 소개되었다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뭔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가 속한 회사와 직무로 나를 소개했지만


다른 분들은  독립출판, 공연 기획, 공간 대여, 만화 연재 등

자신이 도전하고 있는 일로 자신을 소개했다


다른 분들과 대화를 할수록

자꾸만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튀어나와

둥둥 떠다녔다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의 무대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사건이 나에게 일어난 것 같았다


갑자기 그동안은 아무렇지 않았던 내 1년간의 회사생활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권태롭게 느껴졌고, 너무 낯설었다


갑자기 모든 내 서울생활이 질식할 것 같이 답답했고

이러한 기분은 날 약간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방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이 와중에도 이불이 너무 보드랍고 포근해서

여기는 침구까지 최고급을 쓰는구나 생각했다


조용하고 어두운 방안으로는

작은 파도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곳의 항구는 고요했다


만약에 나에게 자기소개를 할 기회가

또 생긴다면 그때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동안 바쁘다고 미뤄왔던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가 났다

알베르 카뮈와 헤르만헤세의 책들이 읽고 싶었고

나만의 글을 쓰고 싶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라도 무언가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것들을 한다 해도 

마음에 쏙 드는 자기소개를 하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일테다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튼 퀴즈의 답은 "자기소개"



이불 덮어쓰고 몰래 읽는 책




한 장이라도 더 읽다

잠들고 싶은 밤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쏟아지는 잠이 짜증 날 정도로

책이 술술 읽혔고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결국엔 잠이 드는 순간에 갑자기

내일 아침의 바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고,

그러니까 또다시 변덕스럽게 빨리 잠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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