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기영 Dec 18. 2023

25. 첫눈을 따라오는 외로움

추억에서 건진 단상

눈이 당장이라도 내릴 듯 하늘이 어둑하다. 눈을 잔뜩 머금어 크고 무거운 구름은 바로 머리 위까지 축 처져있는 듯 가까워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눈발이 살짝 날리다 멈췄다 한다. 젊은 시절에는, 첫눈만 오면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만나는 달콤하지만 이루지 못할 헛된 꿈을 꾸곤 했다. 어엿한 아내와 함께 하는 중년의 나는 오늘 첫눈이 내린다는 예보를 듣곤 세차를 해도 될까를 걱정하고 있다.


그날도 그렇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대학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4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4학년이 되었을 땐 친구들은 모두 군에 입대했고 혼자 남았다. 늦은 저녁, 도서관을 나와 내리는 눈을 맞으며 홀로 깜깜한 교정을 걷다 보면 친구가 없는 외로움과 나이 들어 입대해야 한다는 근심에 한숨만 흘러나왔다.


요행히 장교로 군생활을 하게 되었고, 군생활의 마지막 겨울에 맞이한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눈이 제법 내렸다. 독신장교숙소(BOQ)에 같이 기거하는 동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긴다고 모두 숙소를 떠났고, 숙소에는 인적 없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빈 공간의 적막함이 싫어 시간을 들여 시내로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눈 오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한 시내는 온통 반짝이는 불빛과 함박웃음 짓는 연인들로 넘쳐났다. 고개를 돌리다 실내의 불빛이 환히 비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층에 위치한 조그마한 카페 발견했다. 사람들로 붐비는 길거리에서 추위와 외로움으로 치를 떨던 나는 무작정 카페로 들어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진토닉을 한잔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보니 카페의 조그마한 공간 연인들로 가득고 홀로 앉아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바로 옆의 소란스러운 대화를 흘려들으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어느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는 멈추고,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흐릿해지고, 오로지 나만이 뚜렷이 부각되는 세상과의 단절을 느꼈다.


한참 시간이 흘렀고, 진토닉 한잔을 더 시켜 먹고 나서야 카페를 나섰다. 그 사이 눈발은 멈추었으나 길 위에 쌓인 눈들로 어둠이 퇴색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카페에서의 충동적이고 짧은 일탈을 홀로 감행하고 다시 부대를 향해 들어가는 발걸음은 무겁고 허탈했다. 부대 입구에 다다르자 눈앞에 펼쳐지는 어두움이 내의  퇴색 어두움과는 다르게 선명한 먹빛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갑자기 다가온 먹빛 어두움이 내가 걷게 될 미래의 외로운 모습을 예시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 떨다. 


군대 제대 후. 예감과는 다르게 사회에 진출하여 과중한 일에 쫓기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사느라 젊은 시절 느꼈던 외로움을 다시 체험하기가 어려워졌다. 오히려 어느 순간엔 혼자 있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첫눈이 온다고만 하면, 젊었던 시절 외로웠던 순간들이 마법처럼 떠오른다.


지금은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을지라도, 또 모르겠다. 나이 들어 아내 떠나고, 친구 떠나면, 차가운 바람결에 흩날리는 첫눈을 따라 젊은 시절 외로움이 훅하고 다가올지도.

출처: 네이버(모네, 지베르니 가는 길의 눈,1885)








매거진의 이전글 24. 오해해서 미안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