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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기영 Jan 26. 2024

31. 고난의 역설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평소 좋아하는 다큐 프로그램을 본다.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의 시기에는 연못과 땅이 말라 꽃과 잎과 줄기가 시들어가지만, 뿌리는 깊은 곳에 흐르는 물을 찾아 깊이깊이 뻗어 갑니다" 내레이터의 정돈된 목소리가 조용히 흐른다.


가뭄의 때는 뿌리가 깊이 뻗어 나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미래에 태풍이 와도 끄떡없는 강건함의 터전을 만든다.


나의 인생의 가뭄의 시기들을 생각해 본다. 제법 여러 번 있었지만, 이러한 시기가  인생의 성에 도움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유독 나를 챙겨주고 예뻐해 주던 직장상사가 있었다. 어느 날 나를 불러 상사와 친분 있는 분의 업무편의를 부탁했다. 부탁을 들어준다고 문제가 생길 일이 아니었지만, 고지식한 나는 규정대로 업무를 처리하였다. 당연히 소개받은 고객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고, 그 후로 직장상사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서로 친하게 지내던 관계는 급속히 메말라버렸고, 나는 답답함에 마음 시들어 갔다. 6개월을 버티다, 전출을 요청하여 다른 근무지로 도망치듯 옮겨갔다.


세월이 흘러가며 만나는 사람의 질과 폭이 달라진다. 가족과 친구로 이루어지는 인생 초반의 관계도 어려움이 있지만, 직장, 고객, 지인들로 점점 넓어지면서 관계 더 복잡해지고 힘들어진다.


옮겨간 근무지에서도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인간관계들이 얽히고설켰지만, 직전의 힘들었던 상황이 도움이 되었는지 나름 잘 생존해 냈고 승진도 했다. 그렇다고 태생적인 성격이 바뀌는 것이 아닌지라 업무스타일이 바뀌진 않았지만, 상대방이 느낄 감정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는 지혜가 생겨난 것 같긴 하다.


이제껏 살아온 인생을 되짚어보면, 분기점마다 힘든 상황들이 터지고 이로 인해 직선곡선으로 변하여 방향을 틀고 다시 유유히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 흐르다 구불구불 큰 강을 이루어 낸다. 관계악화, 돈 부족, 건강악화, 자아에 대한 회의 등등 인생의 질곡이 절벽을 만들고 다시 산을 만들어 각 개인의 독특한 비경을 만들어 낸다.


그러하니 누가 인생을 함부로 폄하하며 훼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가물었고, 얼마나 굽이굽이 흘렀고, 얼마나 험난한 산세를 이루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하나는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고난의 순간은 힘들어 도망치거나, 모두 놓아버리고 싶은 괴로움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난이 인생의 깊이를 더해주고 인생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 말이다.


산비탈에 깊이 뿌리내리고 산 위의 그 큰바람을 이겨내는 나이 든 나무처럼, 나도 나이 들수록 조그마한 풍랑에, 아니 큰 태풍에도 미동하지 않는 도도한 강물이나 고준한 산맥이고 싶다. 순간순간 비겁해지고 초초해는 그런 인간 말고 말이다.

출처: 네이버(영화, 흐르는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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