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도프토옙스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 뱀의 꼬리, 그리고 여인(놀랍지 않은가? 여자였다!)의 얼굴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녀는 에키드나와 티폰의 자식으로, 이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괴물들의 부모로 잘 알려진 존재다.
에키드나는 가이아(대지의 여신)와 폰토스(바다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로,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하반신은 뱀의 형상을 한 괴물인데, "괴물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케르베로스(저승의 문을 지키는 세 머리 달린 개), 히드라(머리가 여러 개 달린 불사의 뱀), 그리고 스핑크스 같은 무시무시한 자식들을 낳았다.
티폰은 가이아와 타르타로스(지하 세계의 심연)가 결합하여 태어난 거대한 괴물로, 수많은 머리와 뱀 같은 다리를 가진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우스를 포함한 올림포스 신들과 대적할 정도로 강력했지만, 결국 제우스에게 패배해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된다.
이렇듯 스핑크스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신과 괴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로, 인간과 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그녀는 헤라 여신에 의해 테베로 보내졌고, 테베로 가는 길목을 지키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답을 맞히지 못한 자는 그녀에게 잡아먹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이랬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수많은 이들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달랐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인간이다. 어린 시절에는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어른이 되어 두 발로 걷다가,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세 발로 걷는다."
스핑크스는 자존심이 상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 수수께끼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운명의 흐름 속에 빠져드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과정(결국은 생각으로 인해)처럼, 데카르트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생각'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생각하고 있다는 것.' 세상의 모든 것이 허상일지라도, 생각하는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생각이 인간을 구원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생각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더 이상 가족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가족 역시 그를 짐처럼 여기기 시작한다. 그레고르는 점차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어가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란과 고립감을 깊이 느낀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하는 생각이 만든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생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레고르 잠자의 사례는, 생각이 때로는 우리를 현실에서 고립시키고,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고의 자유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일까, 저주일까?
"인간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덩어리라고 말했고.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변화를 이해하려 애쓰지만, 결국 그 사고는 그를 더 깊은 고립과 절망으로 이끌었다.
이렇듯 생각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지만, 때로는 그 생각이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명화 속에서도 생각하는 인간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렘브란트 – 『명상하는 철학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특별히 배경이 필요하여 렘브란트의 그림을 가져왔다. 이 그림 속 철학자는 창가에 앉아 깊은 사색에 빠져 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장면은 생각이란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색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철학자의 모습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곧 우리 삶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것처럼,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의 미로에 갇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한 문장, 어디에서 써먹을까?
이제 이 고전 속 한 문장을 기억하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문장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믿음직한 도구다.
회의나 토론에서 대화 주도할 때
-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지." 이 한마디면,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멘탈이 흔들릴 때 스스로 다잡기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잖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우리 삶을 만든다고.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게 결국 나를 바꾼다는 거지."
복잡한 인간관계를 설명할 때
- "도스토옙스키가 이미 말했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러니까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는 것도 당연한 거야."
우리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는 존재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존재가 증명된다고 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우리가 늘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고 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 사고가 항상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한 문장이 당신을 철학자로 만들어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대화의 중심에 서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 당신도 이 한 문장으로 유식한 척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