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 소포클레스, 앙드레 지드
한 젊은이가 있었다.
신탁(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일)이 말했다. 그는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고. 그는 절망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그는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비웃듯, 결국 예언대로 흘러갔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는 삶이 사실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면,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루소는 인간이 원래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얽매이게 된다고 보았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정해진 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디에서 살지, 누구와 사랑할지를 선택할 때, 그것이 온전히 우리의 의지에서 비롯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루소가 말하는 '쇠사슬'은 단순히 법과 규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부모, 환경, 경제적 조건, 심지어 우리의 성격적 기질까지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다. 누군가는 교육의 기회를 쉽게 얻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본적인 배움의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다양한 선택지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진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 길(자기 의지로 선택했다고 착각한)은 사실상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만들어진 관념, 부모님의 영향과 경제적 지원, 그리고 경험의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방임이나 사회적 제약 속에서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하고, 기회를 만들려 한다.
"태어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살아가는 것은 선택이다."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우리는 태어날 때의 환경을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자,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은 신탁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예언된 길을 걷고 만다. 그는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었지만, 그 선택이 오히려 운명을 실현하는 과정이 되었다. 운명은 피하려 할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조차도 주어진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완전한 자유란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그 선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다.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명화 속 운명의 상징
『운명의 세 여신』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의 세 여신(모이라이)은 인간의 삶을 실로 엮고, 그것을 자르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한 명은 실을 뽑고, 한 명은 그것을 측정하며, 마지막 한 명이 가위로 실을 끊는다. 이것은 인간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을 의미한다.
이 그림에서 실을 다루는 여신들의 표정은 무심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운명이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진다는 철학적 질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실이 언제, 어떻게 끊어질지는 오직 여신들만이 결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간 스스로 그 실을 다르게 엮을 방법이 있을까?
이 작품은 우리가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그 간의 관점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은 듯하지만, 동시에 '실' 자체를 하나의 재료로서 보면 그 실을 어떻게 직조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 한 문장, 어디에서 써먹을까?
이제 이 고전 속 한 문장을 떠올려보자.
"인간은 자유롭도록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구절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을 논할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된다.
언제 써먹지?
직장 내 현실을 자조할 때
- “루소가 말했잖아, 인간은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요즘 직장인들의 현실이 딱 그렇지 않냐? 퇴사하고 싶어도 쉽게 못 하는 게 현실이잖아. 자유가 있지만 자유가 없어.”
- "야근하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루소가 말한 쇠사슬이 이거였나? 연차도 못 쓰고, 퇴사도 못 하고... 대출금은 발목 잡고. 자유로운 줄 알았던 우리가 사실은 제일 묶여있는 걸지도."
사회 구조를 비판할 때
-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상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이는 거야. 취업, 결혼, 주거 문제도 그렇고. 결국 루소의 쇠사슬 이론이 지금도 유효한 거지.”
SNS에서 살짝 유식함을 드러내고 싶을 때
- "월요일 아침, 또 출근. 자유를 꿈꾸는 우리는 모두 루소였다... #출근길 #루소 #월요병"
- "하고 싶은 거 다 포기하면서 살았는데, 그게 내 선택이었다고? 루소 왈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사슬에 묶여있다' 읽고 1절 했다 진짜... #일상 #공감 #루소"
- "'네가 선택해'라고 하면서 선택지는 안 주는 회사 생활... 루소가 말한 쇠사슬이 이런 걸까 #직장인 #현타 #루소“
운명과 자유의 문제는 철학에서 끝나는 주제가 아니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당신은 단순한 명언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자유롭지만 쇠사슬에 묶인 존재"라는 루소의 통찰, 이제 당신도 제대로 써먹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