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새벽 공기가 낯설지 않았다. 공기 속엔 전날보다 묘하게 더 맑은 투명함이 느껴졌다. 높은 곳으로 올라올수록 산과 하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은 약간 무겁고, 머리는 둔했지만, 그 무게와 둔함조차도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웠다. 산이 내 몸을 자기 속도로 맞추어가는 과정 같았다.
아침 식사로 먹은 누룽지는 마치 고향의 맛 같았다. 설익은 감자, 기름진 국수에 지쳐가던 위장에는 뜨끈하고 고소한 누룽지 한 숟갈이 한 첩의 약처럼 스며들었다. 가볍게 배를 채우고, 푼힐전망대 쪽 언덕으로 올라서자, 오늘 하루를 함께 걸어야 할 다울라기리 연봉과 마을 너머 이어지는 능선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아침 안개가 완전히 걷히지 않아 설산 꼭대기들이 구름과 엉겨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이 산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데우랄리 패스까지 이어지는 길은 숨이 가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멈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 경사면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 옆으로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주인 없는 말들은 풀잎을 물어뜯으며 우리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왠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소”라고 말하는 듯했다.
패스에 도착해 블랙티를 한 잔 마셨다. 고산병에 좋다고 해서가 아니라, 따뜻한 잎차 한 모금이 고산의 찬 공기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는 기분 때문이었다. 산에서는 평소 무심했던 것들이 새삼 소중해진다. 따뜻한 차, 마른 양말, 등허리를 감싸는 아침 햇살 같은 것들이.
앞서가는 포터들의 발걸음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발걸음에는 우리보다 한 겹 더 두터운 무게가 얹혀 있었다. 어깨에 걸친 끈 하나로 50킬로그램은 족히 될 짐을 머리에 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어깨가 결릴 지경이었다.
어떤 포터는 코펠과 버너는 물론, 접이식 식탁까지 이고 가는데, 그 위태로움과 균형감각이 절묘해서 마치 서커스를 보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의 목이 저러고도 성한 것인지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타다파니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사각거렸다. 해발 3,000미터를 넘으니, 공기에는 맛이 있었다. 공기마저 씹히는 느낌. 하지만 그 공기와는 달리 음식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배는 고픈데, 입맛은 실종 상태였다.
감자와 계란을 시켰는데, 감자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제임스> 형님께 슬쩍 물어보니 썩은 감자란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데까지 와서 썩은 감자를 먹게 될 줄이야. 어쩐지 감자도 이 산속에서 제 할 일 다 하고 생을 마감한 기분이었다. 다시 다른 감자를 집었더니 이번엔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름통 옆에서 감자를 보관했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이쯤 되면 감자와 나 사이에 인연은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 와중에 양배추가 눈에 띄어 삶아달라고 했더니, <제임스> 형님은 날로 먹어야 맛있다며 한마디 거들었다. 삶을 것인가, 날것으로 먹을 것인가, 이 소소한 문제로 잠시 토론이 이어졌다. 결국 삶은 양배추와 날 양배추를 각자 한 접시씩 받아 들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산에서는 양배추 한 장에도 철학이 담긴다.
우리 포터들의 짐은 다른 팀에 비해 훨씬 가벼웠지만, 그것이 결코 가벼운 무게는 아니었다. 내가 챙기지 못한 물건들이 그들의 삶의 무게로 변해 어깨 위에 얹혔다. 그 사실이 하루 종일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네팔에서 포터는 비교적 좋은 일자리라고 하지만, 그들의 구부정한 등과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있으면, ‘좋은 일자리’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실감하게 된다.
타다파니에서 코스 문제로 또 한 번 의견 충돌이 있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 각자 의견을 내지만, 결국 하나의 길을 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이드가 없는 만큼, 매 순간의 선택이 책임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르기로 했다. 문제는 그 길이 ‘혼자 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은 정글길이라는 것. 그 문구 하나로 평범한 길이 긴장감 넘치는 모험길로 바뀌었다.
길은 정말 깊은 정글 속으로 이어졌다. 나뭇가지마다 물방울이 반짝였고, 발끝마다 숨겨진 뿌리가 튀어나왔다. 숨은 들이쉬기도 전에 사방에서 자연의 숨결이 들려왔다. 길은 늘 이어지는 듯하면서도, 다음 순간 끊어질 듯 아찔했다. 이런 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긴장과 생생함이 몸을 타고 흘렀다.
몇 개의 계곡을 건너고, 한참을 걸어 츄일레와 구중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지도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콤롱은 그저 지나가는 마을일 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가파른 내리막을 가야 했다. 지친 다리로 내려선 그곳에는, 마당 가득 메리골드가 피어있는 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을 맞는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꽃보다 환한 웃음이 피어 있었다. 따뜻한 물 한 통으로 온몸의 피로를 씻어내고, 오랜만에 우리끼리만 식탁을 차지한 저녁. 스팸찌개를 끓이며, 서로의 고단함을 찌개 국물에 풀어냈다. 산 아래에서 먹던 그 맛은 아니었지만, 오늘 하루의 노고를 따뜻하게 감싸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별빛이 흐드러진 킴롱의 밤, 지친 몸은 바닥에 스며들었고,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우리를 기다릴까. 산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산의 언어를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