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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여성 돈 후안 또는 카사노바 - 조르주 상드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222)

by 금운사 Mar 19. 2025

“인생이 소설과 비슷할 때가 소설이 인생과 비슷할 때보다 더 많다.”라고 말한 희대의 바람둥이요, 뛰어난 작가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의 삶에 대하여 들여다보자. 왕이나 여왕의 신분이 아닌 일반인으로 희대의 바람둥이를 우리는 흔히 돈 후안(Don Juan) 또는 카사노바(Casanova)라고 부른다. 실존 인물인 카사노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문필가로 밀라노, 베를린, 빈, 제네바, 프라하, 파리, 런던 등 100곳 이상의 도시를 떠돌면서 성직자, 군인, 바이올린 연주자, 사서, 대사 비서, 스파이, 사기꾼 등 다양한 직업으로 130여 명의 여인들을 건드렸다. 돈 후안은 스페인의 전설상의 인물로서 방탕아였다. 17세기 스페인의 신부 출신 작가인 티르소 데 몰리나(1584~1648)의 <돈 후안,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라는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다. 여성으로서 이런 바람둥이의 반열에 올라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저명인사와 사랑을 나눈 여인이 되었다. 그래서 “불꽃의 여인” 또는 “여성 돈 후안”이라고 불렸다. 사랑에 한 맺힌 처녀 구신이 씌었는지, 남자 바꾸기를 양말 갈아 신 듯 한 여인, 마약 중독자처럼 불감증과 오르가슴 사이를 그네 타던 여인, 부정한 계집, 요망스러운 암컷, 음탕한 악녀, 귀족들의 하수구, 색광 집힌 암고양이 등 온갖 비난과 저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톨스토이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고 하자, “사랑 있는 곳에 반드시 여자는 있다.”라고 되받아치며 남성 편력을 멈추지 않았던 위대한 소설가, 시인 여성 해방가로 활동한 그녀는 누구인가?

<상드와 뮈세><상드와 뮈세>

그녀는 1804년에 파리에서 모리스 뒤팽 드 프랑퀘이유 (Maurice Dupin de Francueil)와 소피-빅투아르 델라보르드(Sophie-Victoire Delaborde)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아망틴 뤼실 오로르 뒤팽(Amantine Lucile Aurore Dupin, 1804~1876)이다. 집안은 할아버지가 프랑스 군의 원수이며 백작이라서 좋은 배경이었다. 조르주 상드의 아버지도 군인이었고, 그는 상드가 4살 때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어릴 때는 할머니의 집이 있는 노앙 (Nohant) 마을에서 살다가 1822년, 18세의 나이에 남작 장프랑수아 뒤드방의 사생아인 카시미르 뒤드방과 결혼했다. 그녀와 뒤드방은 모리스와 솔랑주라는 두 자녀를 두었다. 결혼 생활의 첫 몇 년은 약간 행복했지만, 곧 다소 무감각한 남편에게 지쳐, 오렐리앙 드 세즈라는 젊은 판사와의 열렬한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었다. 이어 해부학을 전공한, 반은 미치광이이고 반은 폐병환자였던 스테판 아자송 드 그랑샤뉴(Stéphane Ajasson de Grandsagne)와 파리로 사랑의 도망을 치기도 했다. 또 그다음에 아들의 가정교사 쥘 부코란으로 상대를 바꿨다. 남편과는 법적으로 갈라서기로 하고 완전히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행동이 자유로운 그녀는 26 세 때 19 세의 법대생 작가 쥘 상도(Jules Sandeau)를 만났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 그와 합작으로 소설 <Rose et Blanche(1831)>을 썼는데, Jules Sand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독립 소설인 <Indiana(1832)>에서 George Sand를 그녀의 필명(筆名)으로 했으니 이 법대생 애인의 이름에서 연유되었다. 파리에 와서 동거했던 첫 남자 쥘 상도는 그녀가 작가로 입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게으른 데다가 상드가 없는 틈을 타서 다른 여자를 집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둘은 가차 없이 헤어졌다. 그녀는 이 시기에 대담한 성애를 묘사한 이색적 관능 소설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쇼팽과 상드><쇼팽과 상드>

하루라도 남자 없인 안 되는지 상드는 <카르멘>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와 사귀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다가 가까워졌는데,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상드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야말로 One night standing인지 아니면 메리메의 야사(夜事) 솜씨가 별로인지 모른다. 솔직한 상드는 동성애자처럼 가깝게 지내던 여배우 마리에 도르발(Marie Dorval)에게 그것에 대해 소상히 얘기했고, 도르발은 다시 친구였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에게 이 말을 옮겼다. 뒤마가 그의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전해서 결국 온 파리가 유명작가 상드와 메리메의 애정행각을 알게 되었다. 메리메는 상드에게 버림받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뒤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상드는 파리를 시끌벅적하게 했던 연애사건의 당사자인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및 극작가 뮈세(Alfred de Mussset, 1810~1857)를 만나게 된다. 열정과 광기에 휩싸인 둘의 만남은 파리 문단에 큰 화제를 뿌렸다. 두 사람은 1833년 한 잡지 편집자가 마련한 회식자리에서 만났다. 뮈세는 유일한 여성 참석자였던 상드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테이블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니 금방 서로 통하게 되었다. 소설가인 두 아이의 엄마와 6살 연하의 시인은 편지를 교환하다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쇼팽><쇼팽>

뮈세는 희대의 염문가(艶聞家)이며 낭만시인으로 파리 문단에서 로맨티시즘의 4대 서정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었다. 뮈세는 그녀와의 만남을 이렇게 일기에 고백했다. “나 밖에 모르며 황량하게 살던 어느 날 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포로가 됐다. 사랑에 빠졌다.” 뮈세는 상드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해 말 둘은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베네치아는 그 둘의 낭만적 꿈을 실현해 줄 낙원으로 여겨졌다. 사실 뮈세는 시나 멋들어지게 쓸 줄 알았지 침대에서는 꽝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문란한 여성편력 성향이었나 보다. 도착하자마자 상드는 여독에 따른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뮈세는 연인의 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네치아에서 밤의 환락에 빠졌다. 속에 천불이 났지만 참고 건강을 되찾은 상드가 활동을 재개하자, 이번에는 뮈세가 뇌염에 걸려 심한 고열에 정신착란을 동반한 병을 앓게 되었다. 그동안 상드를 치료했던 젊은 의사 파젤로는 이제 상드와 함께 뮈세를 돌보게 되었다. 뮈세는 거의 한 달이 지나서야 위독한 상태를 벗어났다. 그가 깨어나서 보니 상드와 파젤로는 벌써 G선상을 넘어선 연인이 되어있었다. 열불이 난 뮈세는 홀로 파리로 돌아갔고, 이별의 비통함을 시로 승화시켜 그의 생애 중 가장 빛나는 걸작들을 수없이 발표한다.

<상드의 초상화><상드의 초상화>

뮈세가 떠난 뒤, 상드는 파젤로와 몇 달을 더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파젤로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다. 그러자 뮈세는 상드에게 눈물로 애걸하며 다시 돌아와 달라고 매달렸다. 뮈세의 열정적인 편지 공세에 두 사람은 다시 연인관계를 회복한다. 그러니까 파젤로는 발로 차이게 되었고, 질투와 눈물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결국은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상드와 뮈세는 재결합한 후에도 불화만 되풀이했고 얼마 후 이번에는 뮈세가 파국을 선언하고 떠났다. 이에 상드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일기를 뮈세에게 보내어 사랑을 호소하여 다시 만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2년여에 걸친 두 사람의 막장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상드와의 만남은 뮈세를 성숙시켰고 그의 문학적 재능을 더 풍부하게 했지만 그의 개인적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뮈세는 술, 도박,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망쳤다. 둘 사이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출간되었다. 뮈세는 둘의 관계를 소재로 한 <세기(世紀)의 아이의 고백>을 남겼고, 뮈세가 세상을 떠난 후 상드는 <그녀와 그>라는 책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자기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상드의 책이 나오자 뮈세의 동생 폴은 거기에 대응하여 <그와 그녀>라는 책을 냈다. 또 다른 뮈세의 연인이었던 콜레는 <그>라는 책을 출간해서 뮈세를 변호하였다.

<중년의 상드><중년의 상드>

뮈세와의 관계가 틀어지자 상드는 유명한 달변의 변호사 미셸 드 부르즈(Michel de Bourges, 1797~1853)를 소개받았다. 그는 상드의 소설을 읽었고 그녀를 알고 있었다. 사실 상드는 남편 뒤드방 남작과 이혼하는 데 미셸의 도움을 받았다. 남성 우위의 시대에 여성이 남성에게 이혼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상드는 미셸의 조력으로 소송에서 승리하였다. 화려한 언변의 미셸은 상드의 눈을 바라보며 새로운 이상과 목표를 제시했다.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던 카리스마 있는 남자 미셸은 상드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상드의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적극적인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영향으로 그렇지 않아도 공화주의자였던 상드는 더 진보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유부남이었던 미셸은 돈 많은 자신의 아내를 버릴 수 없었다. 상드는 그를 기다리며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난 오직 당신 앞에서만 나약한 존재이고, 당신에게만 헌신적이다.”라고 호소했다. 기다림, 갈망, 희망, 그리움의 6개월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상드는 고통을 받았다. 미셸의 상드에 대한 열정이 식었을 때 상드는 잘 생긴 작가 샤를 디디에(Charles Didier, 1805~1864)와 약 2달간 동거했다. 디디에는 상드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재미로 자신을 만나는지 아니면 정말 사랑하는 건지 궁금해했다. 거의 동시에 상드는 미남 배우 보카주(Pierre-François Bocage)와도 사귀었었다. 그녀는 또 자기 아이들 가정교사이면서 극작가였던 말피유와 연인관계를 가졌다. 상드를 좋아했던 남자들은 대부분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그녀가 떠나자 큰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상드에게는 특별한 마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드의 초상화><상드의 초상화>

다채롭기보다 어지러울 정도인 상드의 연애 전선은 쇼팽을 만나고 나서는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둘은 9년간 같이 지냈다. 쇼팽의 어떤 매력이 폭풍우 같은 그녀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고, 그 긴 시간 동안 동행할 수 있게 했을까? 쇼팽과 상드를 이어준 사람은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와 그의 애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 부인이었다. 원래 상드가 뮈세와 사귈 때 리스트는 뮈세의 여동생의 피아노 가정교사였다. 상드도 리스트를 좋아했지만 리스트는 파리에서 가장 미인이고 사교계의 여왕인 마리 다구에 마음을 두고 있어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마리 다구가 남편인 백작과 불화로 별거하면서 딸을 잃고 실의에 빠지자, 리스트가 상드의 소설을 그녀에게 보내서 마음을 돌려서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마리는 유부녀의 몸으로 리스트와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둘 사이에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평소 책을 많이 읽던 리스트가 상드의 소설을 즐겼고, 이를 애인 마리에게 소개해 주어서, 셋을 죽이 맞아서 같이 잘 지냈다. 마리는 상드에게 감화되어 소설가로 등단하여 여러 작품을 낸다. 마리의 살롱에 온 쇼팽은 리스트의 소개로 상드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두 커플이 당시 파리의 사교계의 가장 핫한 소문을 이끌고 다녔다. 상드를 처음 소개받던 날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밥맛 뚝 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숙녀는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호들갑을 떨며, 남 앞에서는 입맛 없는 체해야 했으며, 약함이 미덕으로 인정받았던 호박씨 왕내숭의 황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드는 남자 복장에 굽을 덧댄 구두를 신고 담배를 피우면서 남성적으로 행동을 했으니. 더구나 쇼팽의 마음속에는 이미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라는 폴란드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상드보다 15살이 어린 소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팽은 그녀와 약혼까지 갔다가 파혼당한 아픔이 커서 처음에는 상드가 눈에 차지 않았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쇼팽에게 6살 연상의 상드는 묘한 매력이 넘치고, 사람들의 리드하는 에너지가 있었다. 그래도 쇼팽은 망설이고 거부했다. 눈치 빠른 상드는 폴란드 출신 문학가들을 활용하여 쇼팽의 아픈 구석을 세밀하게 터치하면서 드디어 쇼팽의 가슴을 열 수 있었다.

<남장한 상드><남장한 상드>

상드가 쇼팽을 확실히 잡을 수 잇었던 것은 그의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심성을 자극하여 확 잡아당기는 전략이었다. 쇼팽의 공연이 잘 풀리지 않고 약간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쇼팽에게 기분 전환 겸 새로운 활력을 찾는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가 망설이며 거절했다. 그래도 그녀는 스페인의 휴양지안 마요르카로 떠날 건데, 스페인 국경의 페르피냥에서 3일간 쇼팽을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혼자 마요르카로 간다고 최후통첩을 하고 가버린다. 상드는 아이들은 데리고 파리에서 디종을 거처 리용까지 육로로 이동하고, 리용에서는 론강의 다니는 배를 이용하여 아비뇽까지 왔다. 아비뇽에서 다시 육로로 몽펠리에를 거쳐 마요르카공국의 수도 페르피냥에 도착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떠나자 쇼팽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상드의 매력에 끌리기는 하지만 가난한 음악가로서 파리 사교계에 추문을 낳게 되면 음악 교습생이 떨어져서 생활고가 걱정되기도, 겨울이 다가오면 병약한 몸으로 파리 생활보다 따뜻한 지중해의 삶이 더 포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고심 끝에 믿을 만한 지인들에게 비밀리에 돈을 빌려서 급행 우편마차를 얻어 타고, 혹시 놓치게 될까 봐 상드의 뒤를 맹렬히 추격한다. 드디어 둘은 상봉을 하고 기쁜 마음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원래 바르셀로나에서 들어가야 하지만 당시 스페인과 왕위계승권 문제로 갈등 중이라 육로는 이용하지 못했다.

<어린 상드><어린 상드>

지중해의 따스한 기후에 포근한 보금자리가 기다릴 줄 알았던 마요르카 섬의 팔미시는 전쟁통에 그들의 상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상한 복장의 유부녀와 아이 둘, 총각 같아 보이는 병약한 사내와는 불륜 관계로 오해된다. 스페인어를 잘 못하니 방을 잡기도 어렵고,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고 예년에 비해 무척 추웠다. 그러자 쇼팽의 폐결핵은 도져서 콜록거리자 의사를 불러 진료를 했다. 모든 의사가 폐결핵으로 죽을 것이라 진단했다. 그러자 어렵사리 얻은 방의 집주인들은 그들을 거리로 쫓아냈다. 병균이 옮은 가구들을 모두 태우고 비용을 청구했다. 거처할 곳을 못 구했지만 생활력 강한 상드가 산속의 버려진 수도원을 찾아서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하루는 상드가 아들 모리스를 데리고 필요한 물품을 구하러 18㎞ 떨어진 팔마 시내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저녁 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일행은 급류에 신발을 잃어버렸고, 마부는 상드 일행을 버리고 달아났다. 상드는 어둠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6시간을 헤맨 끝에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겨우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환자인 쇼팽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밖에는 비가 계속 내렸고 그가 치고 있던 피아노의 건반에도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에 빠진 그의 눈물이었다. 실성한 듯 보였던 그는 상드를 보자 울부짖었다.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그때 쇼팽이 연주한 곡은 <빗방울 전주곡(작품번호 28-15)>으로 알려져 있다.

<상드의 수녀원 생활><상드의 수녀원 생활>

마요르카는 쇼팽과 상드에게 너무 가혹한 곳이었다. 날씨가 매서워 머무르기도 너무 추웠고, 파도가 높아 배를 타고 떠나지도 못했다. 쇼팽은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 앞을 오갔다. 따스하고 행복한 밀월여행은 엄혹한 지욕여행이었다. 상드는 뱃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날씨가 가라앉았다. 즉시 배편을 예약했다. 돌아가는 길은 더 힘들었다. 각혈을 계속하는 환자를 데리고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가까이하지 못할 사람들로 낙인찍힌 그들이었다. 주민의 도움을 받기는 어려웠다. 감염의 우려도 있어 아무도 마차를 빌려주지 않았다. 걷기 힘든 쇼팽은 짐수레에 실려 이동했다. 가져올 때도 고통과 경비가 엄청난 짐이었던 피아노가 갈 때도 골치였다. 무게 탓에 옮기는 것도 어려웠지만, 또다시 높은 관세를 내야만 했다.  마침 그곳에 있던 한 프랑스인 부부에게 그 피아노를 겨우 팔았다. 이 프랑스인 부부의 상속인은 후에 그 피아노와 마요르카에 있던 쇼팽과 상드의 다른 흔적을 모아 발데모사 수도원 한쪽 방을 쇼팽과 상드의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아픔을 견디며, 1839년 2월 13일, 팔마에서 다시 ‘엘 마요르킨’을 타고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육지로 가는 유일한 배편인 엘 마요르킨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배와 나오는 배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나오는 배에는 돼지들이 가득 실려 있어서 일행은 몹시 당황했다. 돼지는 계속해서 울어댔고, 지독한 분뇨 냄새를 풍겼다. 돈이 있어도 일등선실을 이용할 수 없었다. 전염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좋은 선실은커녕 돼지우리에 넣지 않은 것이 선장의 유일한 친절이었다. 18시간 남짓의 뱃길은 길었다. 쇼팽은 편히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는 한 사발의 피를 토했고 곧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했다. 긴급 구조전문을 보냈고 프랑스 영사관이 움직였다. 항구에 가까이 가자 쾌속선이 와서 쇼팽을 옮겨 싣고 육지에 도착하여 응급 처치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렵사리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그곳은 그들에게 제대로 된 세상을 보여주었다. 번듯한 호텔도, 의사도 있었다. 음식도 입에 맞았다. 석 달을 그곳에서 머물면서 쇼팽의 건강은 조금씩 회복됐다. 비로소 여유를 찾은 두 사람은 모처럼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마요르카에서 기대했던 시간을 마르세유가 주었다. 마르세유에서 쇼팽과 상드는 둘의 관계와 서로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 둘이 겪은 극한의 상황은 두 사람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상드는 쇼팽이 섬세하고 예민하면서도 심한 통증과 거친 환경 속에서 참을성 있게 행동한다는 것을 높이 샀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샘솟는 그의 창작력에 놀랐다. 쇼팽은 상드가 헌신적으로 병자인 자신과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과 작가로서의 일을 초인적으로 해나가는 것에 경탄했다. 상드가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는데 상드가 나갔다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자기 꼬리를 따라 빙글빙글 돌며 그녀를 반겨 주어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런 강아지의 모습에 상드는 홀딱 반했고 쇼팽에게 이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이 바로 <강아지 왈츠>이고, 아주 빠른 속도로 전개되어 순간에 끝나버리는 특성 때문에 '순간의 왈츠'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영화 속의 상드><영화 속의 상드>

당시의 상드는 허위 위선과는 아예 담쌓은 듯 남성복장(당시 여자가 남성복을 착용하려면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을 버젓이 입고, 지팡이까지 들고 다니면서 담배를 꼬나물고 남자와 대등하게 문학, 혁명을 얘기했다. 싸롱이나 사교계에서 수십 명의 남자와 공개적으로 교제하면서 빈번하게 남자를 교체하는 게 일이었다. 그러나 쇼팽을 만나고는 많이 바뀌었다. 물론 그것은 상드가 이 수단 저 수단 다 써서 쇼팽을 홀린 관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타고난 모성애로 병약한 쇼팽을 감싸 안으며 긴 시간 사랑을 나눈다. 곧 헤어질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를 비웃기라도 하듯 두 남녀는 장기간 동거에 들어간다. 쇼팽이 남긴 불후의 명작들은 모두 이 기간 동안 작곡된 것으로서, 쇼팽의 천부적 자질과 상드의 정신적 안식이 결합한 셈이다. 이들의 관계는 여러 가지 갈등이 원인이 돼 9년 만에 끝이 나면서 쇼팽의 열정적 창작력 또한 완전히 고갈되고 만다. 이별 3년 뒤 쇼팽은 병을 이기지 못해 사망하게 되는데, 상드는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마음먹은 남자는 누구라도 손에 넣는 바람에 “여자 돈 후안”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상드. 허지만 그녀의 유혹에 끝가지 넘어가지 않았던 남자가 바로 쇼팽을 상드에게 소개해 준 음악가 리스트이다.
 

<영화 속 상드><영화 속 상드>

당시 유럽의 사교계는 겉으로는 교양과 예절,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 피웠던 시절이지만, 그 이면에는 온갖 추악한 남녀상열지사가 감춰져 있었다. 지도층 입네 하는 왕족, 귀족, 성직자의 타락상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서 문화계의 방종과 방탕은 말해서 무얼 할까? 금욕주의자를 자청했던 톨스토이는  매춘부, 하녀, 소작인의 딸과 관계를 가진 것은 물론 친척에게까지 추근대며 근친상간을 넘보기도 했다. 근대 프랑스 사상 가장 경이로운 여성편력을 기록한 모파상은 저술 활동의 이면에 여자사냥에 열중했다. 그래서 42년간의 독신생활을 통틀어 수천 명의 여성과 관계했다. 앙드레 지드는 부인과의 성생활을 한 번도 않은 채 오로지 동성애로 일관된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다. 빅톨 위고는 아내의 외도에 분개한 나머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광적으로 여자를 침실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상드는 사교계의 중심인 파리에서 물러나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인 노앙으로 은퇴하여 생활하기도 했다. 물론 쇼팽을 본격적으로 유혹하기 위해 초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쇼팽과 안식처로 이용하기도 했다. 파리를 떠났다고 그녀의 남성 편력이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골에까지 유대계 독일 출신으로 음악가이며 혁명가인 헤르만과, 조각가 망소(아들의 친구였다)가 찾아온 것은 상드의 나이 45세 때였다. 그녀는 우선 건장한 헤르만을 먼저 선택했으나 헤르만은 1년 만에 슬그머니 상드의 애인 자리를 망소에게 인계한 뒤 우정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상드에게 가장 헌신적이었던 망소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15년간이나 그녀를 정성껏 섬겼다. 이런 관계로 그녀는 아들과도 의절했다.

<영화 속 상드><영화 속 상드>

19세기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능동적으로 남성을 리드하며 사랑을 쟁취했던 여인, 그 사랑의 힘으로 당대 지식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했던 여인, 모든 남자들로부터 정신적 연인이라는 추앙을 받았던 여인, 그들과의 연인 관계, 문인 동지, 혁명 동지로 근세 정신사에 한 획을 그은 여인이 상드이다. 보들레르 등은 그런 그녀를 ‘매춘부’, ‘공중변소’ 등의 원색적인 비난을 남기기도 했으나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상드와 친구였던 위고는 “사람들이 상드를 욕할 때 그것이 상드를 더 명예롭게 하는 것 같다”고도했다. 그는 상드가 죽자 기꺼이 그녀의 추도사를 썼다. 1840년 이후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또 빅토르 위고나 공쿠르 형제, 투르게네프, 들라크루아, 폴린 비아르도 등 수많은 유명 예술가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다. 플로베르, 발작, 보들레르, 알프레드 드 뷔니, 에밀 졸라, 하인리히 하이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바쿠닌, 안데르센, 앙리 베르그송 등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의 지성과 성찰이 놀랍다. 상드는 이처럼 72년의 생애 동안 우정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 2,000명이 넘는 신비와 전설의 여인이었으며, 정열의 화신이었고 ‘사랑의 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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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드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약 40년간의 문필생활 동안 70편의 소설과 24편의 희곡, 그리고 4만 통에 달하는 편지들을 썼다. 편지 중 발견된 것만도 18,000여 통에 이르고 이것은 26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계산상 60년 동안 매일 2통을 쓰면 43,800 통이니, 그 양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21세의 그녀가 하루 저녁에 쓴 편지는 190장에 이르기도 했단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녀가 유명한 것은 뮈세, 쇼팽 등을 위시한 시인, 음악가, 예술가, 사상가들과의 파란만장한 연애 덕분이다. 밤늦도록 창작하고,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며 애인들을 돌보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대저택의 정원 일에 열을 올리며 바느질과 부엌일까지 즐겨했던 그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솟아 나오는가? 그녀는 소설, 드라마, 동화, 기고문, 정치논평 등 다양한 방면에 수많은 글을 남겼다. 힘든 쇼팽의 창작과정에 비해 상드는 쉽게 글을 썼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이 글이 흘러나왔다. 주로 남들이 잠드는 밤을 이용해서 글을 썼던 상드였다. 새벽에 한 편의 소설을 끝내자마자 다른 소설을 바로 시작하기도 했다. 상드는 짧은 시간 내에 한 편의 소설을 끝내기로 유명했다. 짧은 기간에 쓰였지만, 주제, 소재는 다양했고 독창적이었다. 밤에 주로 저술활동을 한 탓에 밝은 햇빛이 불편해서 40세 전후에는 색안경을 껴야 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장님 같다고 놀렸다. 간혹 방문객이 성가셨던 상드는 하녀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종이 뭉치와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는 책상에 앉게 해서 손님을 맞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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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처음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1830년 7월 혁명을 계기로 정치에 눈을 떴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도 하였다.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였던 그녀는 미셸 드 부르주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녀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싸웠다.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공보장관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급진적인 파리 코뮌에는 반대했다. 그녀는 베푸는 사람이었다. 인기작가인 그녀는 글을 써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검소한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멀든 가깝든 그녀와 관련되는 가족과 친구는 대부분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파리 입성 초창기 돈을 벌 목적으로 글을 썼다는 그녀는, 분명 돈의 노예로 살지는 않았다. 상드라는 남성다운 필명을 계속 고집한 이유는 이렇다. 여성의 원고료가 남성보다 적게 책정되어 편집자와 싸운 이후로 그 필명으로 결심했고, 또한 아직 이혼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기혼 여성의 원고료가 남편에게 결제되는 상황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근대 프랑스 역사상, 문학과 사회활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성 중에 하나였던, 조르주 상드는 1869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려던 최고 훈장을 거절했다. 훈장수여 제안을 받은 그녀는 담당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내 배에 붉은 휘장을 걸치면 늙은 식당 아줌마 같이 보일 거예요” 그녀의 파란만장한 작품과 삶은 다른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의 작품 모티브가 되었고, 시와, 연극 특히 많은 영화들이 창작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을 딴 파인애플 향의 향수제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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