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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上平田(상평전) / 상평 밭

금삿갓의 漢詩工夫(251125)

by 금삿갓

上平田(상평전) / 상평 밭

- 王維(왕유)


朝耕上平田

조경상평전

○○●○○

아침에는 상평 밭을 갈고


暮耕下平田

모경하평전

●○●○○

저물녘에 하평 밭을 갈았네.


借問問津者

차문문진자

●●●○●

나루터를 묻는 자들에게 물어도


寧知沮溺賢

연지저익현

○○●●○

어찌 장저 걸익의 어짊을 알까

초원.JPG

凡田疇上平者(범전주상평자)를 謂之上平田(위지상평전)이라하며, 下平者(하평자)를 謂之下平田(위지하평자)이라하고, 別無他意昧者(별무타의미자)라. 朝而耕於上平田(조이경어상평전)하고, 暮而耕於下平田(모이경어하평전)하니, 稼穡艱難(가색간난)을 亦可知矣(역가지의)라. 問津者(문진자)는 孔子(공자)라. 沮溺(저익)은 長沮桀溺(장저결익)이라. 設問(설문) ‘古之問津者寧知沮溺之賢乎(고지문진자녕지저익지현호)아’하니 耕稼中(경가중)에 必有賢人君子之類而誰能之耶(필유현인군자지류이수능지야)아. 此乃援古比今者也)차내원고비금자야)라.

대체로 밭이랑이 위가 평평한 것은 상평전(上平田)이라 말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을 하평전(下平田) 이라 말하지만 특별히 다른 의미는 없다. 아침이 되어서는 상평전에서 밭갈이를 하고, 저물녘이 되어서는 하평전에서 밭갈이를 하니, 심고 거두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나루터를 묻는 자는 공자(孔子)이고, 저익(沮溺)은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다. 가설하여 묻기를, ‘옛날에 나루를 물었던 자가 어떻게 장저와 걸익이 현명한 줄을 알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농사를 짓는 중에도 반드시 현인이나 군자 같은 부류가 있는데 누가 알 수가 있겠는가?”라 것이다. 이것은 옛 일을 원용해서 현재의 일을 비유한 것이다.


* 이 시는 왕유가 그의 친구 황보악(皇甫嶽)의 별장이 있는 운계(雲溪)에 가서 읊은 5수의 시 중의 4번째 시이다. <皇甫嶽雲溪雜題五首>

* 借问(차문): 빌어서 묻는다는 경어체.

* 問津(문진) : 공자가 유람할 때 물을 만나면 자로를 시켜서 근처 사람에게 나루터를 묻는 고사를 말한다.

* 沮溺(저익): 춘추시대의 은사인 정저(長沮)와 걸익(桀溺)의 합칭(合稱)이며, 후대에 한시나 문장에서 은둔한 현자의 대명사로 쓰였다.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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