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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변방에서 활짝 핀 – 왕소군(王昭君)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1127)

by 금삿갓

황량하고 끝없이 넓은 사막의 황혼 속에서 심금을 울리는 비파 소리를 들어보면 감회가 어떨까? 아니면 조용한 밤에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 위에서 방향도 잘 모르면서 미지의 낯선 곳으로 이동하는 기분을 어떨까? 2천 년 전에 한 절세의 미녀가 본인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나라의 부름을 받아 화친(和親)의 목적으로 말하자면 팔려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영화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화이니 처량한 역사의 주인공 이야기다. 우리는 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을 때 곧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한다. 바로 이 문구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비유한 시에서 비롯되었다. 당대(唐代) 시인 동방규(東方虬)의 <소군원(小君怨)> 3수(首)의 마지막 수의 승구(承句)이다. 같은 제목의 시는 이백(李白) 등 수많은 시인들이 지었으나 유독 동방규의 이 구절이 계절의 날씨와 연관되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것이다. 주인공 왕소군(王昭君), 본명은 왕장(王嫱)이고 그녀의 자(字)가 소군(小君)이라서 그렇게 부른다. 그녀는 기원전 약 52년쯤 서한(西漢) 시기에 오늘날 후베이 지역에 위치한 흥산의 소흥촌(興山 昭君村)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출생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보자. 소흥촌에 왕양(王襄)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이 집에는 아이가 없어서 늘 걱정이었다. 마을 근처에 초(楚) 나라의 정치가요 문인인 굴원묘(屈原廟)가 있는데, 거기 가서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빌며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었다. 굴원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을 흠모하는 지방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다. 정말 영험하다는 말을 믿은 이들 부부는 굴원묘에 제물을 차려 정성을 다해 빌었다. 그러던 8월 15일 밤, 그의 아내는 꿈에 밝은 달을 품에 안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둥근달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 아기를 낳았다. 바로 왕소군이었다. 소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부지런하고 배우기를 좋아했고, 마음씨도 착했으며, 달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양귀비(楊貴妃), 서시(西施), 초선(貂蟬)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인데, 다른 미녀들이 경국지색(傾國之色) 즉 나라를 기울여지게 하는 미녀였다면 왕소군은 나라의 화친과 발전을 위해 희생된 가련한 여인이다.

나중에 왕소군이 아름답게 자라서 그 미모가 고을 밖으로 널리 알려지자 드디어 그녀가 왕실의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하게 되었다. 돈 없고 백 없는 시골 출신 여인이 후궁으로 들어가면 출세한 것으로 여기나, 현장은 전혀 아니다. 궁궐에 연예인 뺨치는 미모의 후궁이 어디 1~2백 명인가. 매일매일 시시각각 미인 대회를 연상하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겨우 황제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당시는 궁궐에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고 사람의 미모를 말로 표현할 기준도 모호하여 오직 화공(畫工)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여 미녀를 선발했다. 황제가 매일 모든 미녀를 불러 모아 놓고 면접을 볼 수도 없으니 화공(畫工)의 실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후궁이 황제의 은총을 입을 기회는 화공의 손에 달린 것이다. 당시 궁궐에는 모연수(毛延壽)라는 인물화에 능한 화공이 이를 담당하였고, 이 친구는 뇌물을 아주 밝히는 성격이었다. 그러자 궁녀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치며 자기 얼굴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요구했다. 반면에 왕소군은 가진 게 없어서 뇌물을 바칠 수가 없었다. 모연수는 당연히 그녀의 외모를 실제보다 못나게 그리고 눈 밑에 점까지 찍어서 입궁한 지 몇 년에 한 번도 은총을 못 받았다. 한나라 시절 이런 폐단 때문에 한 때 사람이 아닌 양을 한 마리 풀어놓고, 그 양이 다가가서 머무는 전각의 미녀를 간택하여 올리는 방안도 있었다. 이 방법도 궁녀들이 양이 좋아하는 풀이나 먹이로 양들을 유혹해서 시행을 중단했다. 훗날 북송의 구양수(歐陽修)가 서정시를 잘 안 짓는 왕안석(王安石)의 시 <명비곡(明妃曲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으면서 이런 사실을 슬쩍 흘렸다. “漢宮有佳人(한궁유가인) / 한나라 궁중에 미인 있지만, 天子初未識(천자초미식) / 천자도 처음에 알지 못했네. 一朝隨漢使(일조수한사) / 어느 날 아침 한나라 사신 따라, 遠嫁單于國(원가선우국) / 흉노로 멀리 시집간다네.”

당시 한(漢) 나라 시절 흉노족들은 늘 중국의 변방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므로 이에 대한 단속이 국가의 큰일이었다. 이들은 유목민이라서 정벌하러 가면 멀리 벌판으로 도망가고 조용해지면 다시 약탈하기에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기원전 35년, 호한야(呼韓邪) 선우(单于)가 흉노를 통일하자, 그는 세 번이나 장안의 한 왕조에 와서 원제(元帝)를 만났다. 한나라 왕실과 화친 관계를 맺고 공주나 왕녀를 주면 사위가 되어 복종하겠다고 제안했다. 힘으로 하면 단번에 무찌를 수 있지만 전멸시키기는 어렵고, 수시로 와서 약탈하는 오랑캐를 순치하는 것도 좋은 방안으로 생각한 한나라 조정은 화친혼을 허락한다. 그런데 신부로 황제의 소생인 공주를 줄 수 없으므로 후궁 중에서 적당히 골라 보내고 입막음을 할 생각이다. 그래서 화공이 그린 그림 중에서 점 있고 못 생긴 여인 왕소군을 신붓감으로 선정해서 공주로 신분 둔갑을 시켰다. 황제가 공주로 봉하려고 당사자를 어전에 나오라고 하면서 문제가 생긴 거다. 이때 황제 앞에서 명을 받들려고 고개를 든 왕소군은 한창 꽃다운 모습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재기도 발랄해 보였던 것이다. 다른 어느 비빈에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했다. 원제(元帝)와 만조백관은 그 자리에서 소군의 모습에 깜짝 놀란 것이다. 원제는 매일 밤 은총을 내릴 여인을 선택할 때 화공 모연수로부터 속은 것이다. 이런 미인이었으면 진작에 승은을 내리고 매일 밤을 같이 보낼 건데, 엉뚱하게도 오랑캐 적국의 왕에게 상납 아닌 하사를 하게 되었으니 열불이 아니 날 수 있겠는가. 이에 화가 난 한 원제는 곧이어 이 화공 모연수를 왕을 기만하고 궁궐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며, 재물을 횡령한 죄로 다스려 모연수를 기시(棄市, 사형에 처하여 그 시체를 거리에 버려둠)의 형벌에 처하여 죽였다. 후대 송(宋) 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은 시문학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이 장면을 <명비곡(明妃曲)>의 시에서 “意態由來畫不成(의태유래화불성) / 마음씨는 본래 그리려 해도 못 그리나니, 當時枉殺毛延壽(당시왕살모연수) / 당시에 모연수를 억울하게 죽였네.”라고 읊어서 모연수를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혼례가 결정된 후 왕소군은 신행(新行)을 준비하는 동안, 훌륭한 스승과 함께 흉노어와 비파를 배웠다고 한다. 원래 재주가 많았던 그녀가 연주하는 비파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새들이 나뭇가지에 머물며 울음을 그친다고 했다. 왕소군이 성혼 후 장안을 떠나던 날, 백성들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하는 모습을 보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장안을 이별하는 것이다. 당시 국가 간 결혼이고, 특히 황제의 공주가 시집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단순한 백성의 결혼과는 규모가 천양지차이다. 혼례예물도 어마어마하며, 따르는 시종이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마치 거대한 상단(商團)이 무리 지어 이동하는 듯했다. 중국의 국경을 넘어 물설고 낯선 이민족의 땅에 들어서면서 보든 분위기가 달라진다. 황량한 들판과 쓸쓸한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곳으로 시집을 가자니 속이 무너질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왕소군은 타고 가던 가마 속에서 비파를 꺼내서 자기의 심정을 담아 구슬픈 곡조를 연주했다. 험한 길에서는 말이 울부짖고, 날아가는 기러기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며, 슬픔과 절박함이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게 했다.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그녀는 비장한 마음을 담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고향과 조국을 생각하며 이별의 노래를 연주한 것이다. 그러자 날아가던 기러기들이 이 애절한 왕소군의 비파 소리를 듣더니 같이 슬퍼서 날개를 접고 떨어지는 무리가 많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4대 미녀의 이름 대신 지칭하는 용어가 왕소군의 경우는 낙안(落雁)이다. 참고로 양귀비는 꽃도 부끄러워해서 고개를 숙였다고 수화(羞花)이고, 초선은 달도 얼굴을 가렸다고 폐월(閉月), 서시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서 가라앉았다고 침어(侵漁)이다. 이때 왕소군이 비통한 마음을 담아 읊은 시가 <원사(怨詞)>이다. 아마 그녀는 이 가사를 비파에 실어서 노래했을 것이다. 그중 일부를 보면 아래와 같다.

秋木萋萋(추목처처) / 가을 나무 우거져도

其葉萎黃(기엽위황) / 그 잎은 시들어 노랗네.

有鳥處山(유조처산) / 산에 새들 있어도

集于苞桑(집우포상) / 뽕나무 등걸에 모였구나.

(중략)

父兮母兮(부혜모혜) / 아버님 어머님,

進阻且長(진조차장) / 나아갈 길 험하고도 머네요.

嗚呼哀哉(오호애재) / 오호 애재라,

憂心惻傷(우심측상) / 근심과 슬픔으로 찢어지네.

왕소군이 고향을 떠나 먼 길을 달려 흉노에 오자 흉노왕 호한야 선우는 그녀를 그들의 격식에 따라 '녕호연지(宁胡閼氏:녕호알씨)'로 봉해주었다. 연지(閼氏:알씨)라는 용어는 흉노에서 왕비를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그녀가 흉노에게 평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주로 명비(明妃)라는 칭호를 많이 쓴다. 왕소군은 선우의 왕비가 되어 흉노에 점차 정을 붙이고 정착하였다. 그녀는 호한야 선우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설득했고, 그녀의 현덕한 능력으로 중원의 문화를 조금씩 흉노에게 전해주었다. 흉노의 왕 선우도 그녀를 사랑하여 궁중에서 연주하는 모든 악기와 음률을 한나라 스타일로 모두 바꾸고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모양이다. 당나라 시인 저광희(儲光羲)는 <명비사(明妃詞)>에서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胡王知妾不勝悲(호왕지첩불승비) / 오랑캐왕은 첩이 슬픔을 못 이김을 알아

樂府皆傳漢國辭(악부개전한국사) / 악부에서 모두 한나라 가사를 연주케 했다네.

朝來馬上箜篌引(조래마상공후인) / 아침에 와서 말 위에서 공후인을 연주하니

稍似宮中閑夜時(초사궁중한야시) / 차츰 한나라 궁중의 한가한 밤과 같아지네.

그녀는 한나라의 선진 농경술을 흉노 백성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이 자신의 식량과 농기구를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또한 한족의 문화를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그녀의 교화 지도 아래 흉노 인구는 점점 더 번창했다. 아들 하나를 낳은 후 안타깝게도 3년이 지나, 남편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남편의 장례 후에 왕소군은 한나라 황제에게 중원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제는 죽고 즉위한 성제(成帝)는 그녀에게 호인의 풍습을 따르라고 명령했고, 절대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없이 흉노에 머물러야 했다. 흉노의 결혼 문화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兄死取嫂)나 수계혼(收繼婚) 문화였다. 수계혼은 가정의 재산을 온전히 지킬 목적으로 죽은 남편의 가족 중 친생자 이외의 성인 남자 누구라도 혼인을 이어받는 제도이다. 호한야 선우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자, 흉노족 출신 왕비가 낳은 아들인 복주루약제(复株累若鞮) 선우(單于)가 즉위하여 그와 다시 결혼해야 했다. 왕소군은 흉노에서 전 남편과 1남, 후 남편과 2녀를 낳았고, 그녀의 아이들에게 한나라와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지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 후, 흉노와 한나라는 화목하게 지내며 무려 7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왕소군은 두 번째 남편도 떠나보낸 후에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한다. 자식들은 지금의 내몽골 후허하오터시(呼和浩特市) 남쪽 교외의 대청산 언저리에 그녀의 무덤을 만들었다. 후손들은 이를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영회고적 5수(詠懷古迹五首)> 가운데 세 번째 수에서 이 사실을 읊고 있다.

一去紫臺連朔漠(일거자대연삭막) / 궁전 한 번 떠나 북쪽 사막에 이어지니

獨留靑塚向黃昏(독류청총향황혼) / 홀로 푸른 무덤으로 황혼 향해 있구나.

그런데 왕소군의 청총묘는 위의 묘 이외에 두 곳이 더 있다. 하나는 산서성과 내몽골의 접경지인 삭주(朔州)의 삭성구(朔城區) 남유림(南楡林) 향청종촌(鄕靑鐘村)에 있는데, 제법 규모가 크고 왕소군의 초상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다른 하나는 하남성 허창시(許昌市) 양성현(襄城縣)에 청총이 있다. 이는 실묘(實墓)가 아니라 왕소군이 출새(出塞)하는 상황을 기념하는 의관총(衣冠塚)이다. 주변에 숲이 무성하여 경치가 좋다고 한다.

이렇듯 후대의 문인들이 왕소군을 노래한 시가 모두 7백여 수에 이르고, 희곡이나 소설 등의 작품도 4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후세에게 남긴 영향력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다만 흉노의 역사적 사료 부족과 마찬가지로 중국 정사(正史)나 기록 자료도 매우 부족하다. 왕소군이 태어났던 고향마을인 소군촌 마을은 지금 전체 300여 명이 거주 하고 대부분 왕씨 성을 쓴다고 한다. 이곳 흥산현에 왕소군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8m 높이의 왕소군 백옥 입상이 세워졌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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