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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18. 2024

86> 陌上贈美人(맥상증미인) / 길에서 미인에게 주다

漢詩工夫(240510)

陌上贈美人(맥상증미인) / 길거리에서 미인에게 주다.

 - 이백(李白)


駿馬驕行踏落花

준마교행답낙화

●●○○●●◎

준마는 떨어진 꽃을 밟으며 씩씩하게 가다가


垂鞭直拂五雲車

수편직불오운거

○○●●●○◎

채찍을 늘어뜨리고 오운거와 바로 스치었네.


美人一笑捲珠箔

미인일소건주박

●○●●○○●

미인이 구슬발을 걷고 생긋 웃으면서


遙指紅樓是妾家

요지홍루시첩가

○●○○●●◎

멀리 손가락으로 홍루를 가리키며 자기네 집이라네.

* 陌上(맥상) : 한길 또는 밭둑길.

* 駿馬(준마) : 잘 달리는 좋은 말.

* 驕行(교행) : 씩씩하게 가는 것. 驕는 ‘교만하다. 방자하다’임.

* 垂鞭(수편) : 채찍을 내려트리다.

* 直拂(직불) : 곧바로 스침.

* 五雲車(오운거) : 오색구름을 그린 수레.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수레.

* 珠箔(주박) : 구슬로 꾸민 발. 珠簾(주렴).

* 遙指(요지) : 손가락을 흔듦. 멀리 손가락으로 가리킴.

* 紅樓(홍루) : 붉게 칠한 집. ① 부유한 집안의 부녀가 거처하는 처소. ② 기생집.

此當是五陵游俠(차당시오릉유협)이 陌上春遊(맥상춘유)라. 少年上馬之鞭(소년상마지편)이 直不到美人五雲車上(직부도미인오운거상)하니 盖有意於調笑美人也(개유의어조소미인야)라. 於是(어시)에 美人(미인)이 果嫣然一笑(과언연일소)하고 手褰車上之簾箔(수건거상지렴박)하야 以迎少年(이영소년)하니 將有言也(장유언야)라. 遙指紅樓(요지홍루)는 此時美人手勢(차시미인수세)라. 是妾家(시첩가)는 美人口答也(미인구담야)라. 褰簾遙指(건렴요지)하니 明媚之態宛然(명미지태완연)이라. 太白(태백)이 偶見於陌上故(우견어맥상고)로 賦其事以遙贈也(부기사이요증야)니. 然(연)이나 亦不必認眞(역불필인진)이라.

이는 당시 오릉의 유협이 맥상에서 봄놀이를 하는 것이다. 소년이 말 위에서의 채찍은 바로 오운거 상에 이르지 않았는데, 대개 미인을 조소함에 뜻이 있는 것이다. 이에 미인이 과연 씽끗 한번 웃고는 손으로 수레의 발을 걷고 소년을 맞아 말을 하려 해서이다. ‘멀리 홍루를 가리킨다.’는 말은 이때 미인의 손의 형세다. ‘저게 첩의 집이다.’는 말은 미인의 답하는 말이다. 발을 걷어 올리고 멀리 가리켰으니, 윙크하는 자태를 완연히 밝혔다. 이태백이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연고로 그 일을 지어 멀리 보낸 것이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진심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 이백(李白) : 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이백(李白)은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다. 두보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한편 이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이 밖에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천(西川)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녔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산중에서 지낸 적이 많았다.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이백의 임무는 포고문 초안을 마련하거나, 임금의 향연에 불려 나가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시를 짓는 일이 고작이었다.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일종의 어용 문학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낀 이백은 결국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한다.

결국 그는 744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하기도 했다. 이후 안녹산의 난이 시작된 755년까지 산동성의 집을 거점으로 북쪽과 남쪽의 여러 지방을 두루 유람했다. 안녹산의 난으로 당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신했고 결국 그의 아들 형이 왕위에 올라 당 숙종이 되었다. 이백도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다. 그는 756년 안녹산 잔당을 토벌하여 기세를 떨치던 영왕 린의 권유에 못 이겨 그의 막하에 가담하지만, 그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숙종에 의해 린의 거사가 역모로 간주되었고, 결국 이백 역시 연루되어 옥살이 끝에 귀양을 가다가, 중앙 관직에 남아 있던 술친구, 시친구들의 도움으로 759년에 사면되었다. 그 후 이백은 여기저기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시는 <산중문답(山中問答)> 등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하는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들이다.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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