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햄 공원의 끝 부분에서 바기오 재래시장 쪽으로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이라 하기에는 작고 그냥 정원 정도로 보면 될 듯하다. 이 공원이 이고롯(Igorot) 공원이다. 이고롯 인종은 필리핀 루손섬의 북부 산간지대에 흩어져 사는 종족으로 오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 족에 속한다. 바기오도 산악지대이기에 이고롯 족들이 오랜 기간 이곳에서 살았다. 한 때는 이 들 종족이 필리핀 전역에 15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단다. 그들은 산비탈에서 계단식 논을 만들어 벼를 재배하며 부락단위로 살았고, 일부는 열대 우림에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그런데 필리핀과 미국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들의 터전을 빼앗아 현대화를 이룩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기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괴물 같은 이민족들과 힘겨운 투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화된 무기와 훈련된 병력의 숫자에 밀려 결국은 터전을 잃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비극을 겪은 것이다. 이 공원은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소박하게나마 이고롯족 전사의 동상들을 세워 놓고 있었다. 이고롯 5 종족(Ibalois, Bontocs, Kalingas, Ifugaos, Kankanaeys) 전사의 동상은 코르디예라 자유 기념비(Cordillera Freedom Monument)이다. 전통 의상, 머리 장식, 장신구를 착용한 5명의 이고롯 남자 조각상이 창과 방패를 든 채 전투에 대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은 이들의 원한이나 염원을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그냥 체스를 두는 한가한 사람, 각종 생업에 열심인 노점상들과 사진 찍은 관광객의 일별(一瞥)뿐이다. 힘없는 원주민의 비참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가슴 한 곳이 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