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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烏衣巷(오의항)

금삿갓의 漢詩工夫(241002)

by 금삿갓

烏衣巷(오의항)

- 劉禹錫(유우석)

<在今江寗府南(재금강녕부남)하야. 晋謝安(진사안)과 王導(왕도)가 居此巷(거차항)하야. 其子弟(기자제)가 皆烏衣故(개오의고)로 名(명)이라. / 오의항은 지금 강녕부 남쪽에 있어서 진나라의 사안과 왕도가 이 골목에 살면서 그의 자제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오의항이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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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雀橋邊野草花

주작교변야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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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교 주변에는 들꽃이 피고


烏衣巷口夕陽斜

오의항구석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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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항 어귀에는 석양이 진다.


舊時王謝堂上燕

구시왕사당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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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 위를 날던 제비


飛入尋常百姓家

비입심상백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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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평범한 백성의 집으로 날아든다.

* 烏衣巷(오의항) :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동남쪽의 거리. 오(吳) 나라 때 석두성(石頭城)을 호위하던 병영이 이곳에 있었는데, 당시 병사들이 검은 옷을 입고 다녀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동진(東晋)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왕도(王導)와 사안(謝安) 등의 귀족들이 이

골목에 많아 살았다.

* 朱雀橋(주작교) : 진회하(秦淮河)에 있는 다리 이름. 지금의 南京市(남경시) 취보문(聚寶門) 안에 있는 진회교(秦淮橋)가 바로 그 유적이다. 이 다리는 오의항(烏衣巷)에 있다.

* 왕사(王謝) : 동진(東晋) 때 개국공신이었던 왕도(王導)와 고관대작이었던 사안(謝安)의 양대 부호 귀족을 가리킨다.

* 심상(尋常) : 예사롭게, 普通(보통) 평상시(平常時)의 준말. 항상(恒常). 대수롭지 않고 예사(例事)로움. 흔하고 평범하다.

* 何等 : 1.어떤 2.어떠한 3.얼마나 4.어쩌면 그토록

昔時(석시)에 王謝門弟(왕사문제)가 在此橋之左右(재차교지좌우)하야. 何等顯耀(하등현요)러니, 今橋邊(금교변)에 且徧生野草花矣(차편생야초화의)라. 巷口(항구)에 無人(무인)하고, 惟見夕陽(유견석양)이 慘淡而已(참담이이)라. 必云巷口者(필운항구자)는 朱雀橋(주작교)가 在巷口也(재항구야)라. 舊時二字(구시2자)는 極寓感慨嘲笑(극우감개조소)하니, 盖王謝勢位(개왕사세위)가 隆盛之舊時(융성지구시)호대 實指當時執政(실지당시집정)이 威權赫奕之舊時也(위권혁돌지구시야)라.

옛적에 왕씨와 사씨 가문의 자제가 이 다리의 좌우에 있어서, 어쩌면 눈부시게 빛나더니 지금은 다리 가에 또한 두루 야생 풀꽃이 자란다. 골목 어귀에 사람이 없고, 오직 석양의 쓸쓸하고 처량함만 보일 뿐이다. 하필 항구(巷口)라고 말한 것은 주작교가 이 항구(巷口)에 있기 때문이다. 구시(舊時)란 두 글자는 감개(感慨)와 조소(嘲笑)를 극히 붙인 것이니, 대개 왕씨와 사씨의 세력과 지위가 융성하던 옛적이니, 실은 당시의 집정자들이 권위가 혁혁하던 옛적을 가리킨 것이다.

堂前燕(당전연)은 王謝堂前(왕사덩전)에 世人(세인)이 趨承獻媚之所也(추승헌미지소야)니, 得以依托捿附(득이의탁서부)가 何異鷰子(하이연자)리오. 何意王謝旣衰(하의왕사기쇠)에 其堂(기당)이 亦毁(역훼)하야. 燕亦無所安身矣(연역무소안신의)라. 百姓家與王謝堂(백성가여왕사당)이 奚啻天淵(해시천연)이리오. 况加尋常二字則更屬不堪矣(황가심상2자즉갱속불감의)라. 燕無所托(연무소탁)하야. 只得飛入(지득비입)하니, 非但燕子(비단연자)가 捿興而舊時王謝(서흥이구시왕사)가 何以爲情哉(하이위정재)리오.

당전연(堂前燕)은 왕씨와 사씨의 당 앞에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아첨을 바치던 곳이니 의탁하여 더부살이함이 어찌 제비와 다른가? 어찌 왕씨 사씨 쇠해지고 그 당이 역시 훼손되어 제비도 편안히 몸 둘 곳이 없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민가와 왕씨 사씨의 당이 어찌 연못이 될 뿐이겠는가? 하물며 심상(尋常)이란 두자를 더하니, 더욱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제비도 의탁할 곳이 없어서, 다만 날아드니 제비만이 옛적의 왕씨 사씨와 살던 삶을 일으킴에 어찌 정을 둘 뿐이겠는가?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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