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다를 뿐
간혹 얘기를 하다 보면 분명 재미로 말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냥 흘러 넘길 수 있는데 남편의 얘기는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 게 많다. 편해서 그런가 가까워서 그런가. 남자들은 왜 그렇게 장난꾸러기(?)인지. 특히 신체나 성격의 단점들에 대해서 놀리듯이 얘기할 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런 성향은 평소 TV 스타일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인데 남편이 두 번이나 볼 정도로 감동인 드라마라고(평소에 반복을 잘 안 한다.) 꼭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다. 가족 드라마라고 하니 아이와 함께 봐도 괜찮겠다 싶어 셋이 소파에 앉았다.
드라마의 내용은 이랬다. 한참 꿈을 키워 나가야 할 고등학생 아이들이 아이를 갖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꿈을 포기한 채 사회에 나와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본가에서 아이를 반대했던 상황이라 지원도 못 받은 채 고군분투하며 아이를 키웠다. 어느새 쌍둥이 아이들은 18살이 되었지만 그동안 관계는 망가졌고 한 아이는 학교 폭력을 당하고, 부부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토리만 들으면 우울하기 그지없는 드라마 같지만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장면으로 과거와 현재를 풀어가는 드라마다.
드라마에서 여자는 아이를 키우는 18년 동안 자신의 꿈인 아나운서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준비하고 도전했다. 하지만 '애엄마'라는 이유로 떨어지거나 어쩌다 취업이 되더라도 '애엄마'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온갖 비난과 수모를 겪었다. 여기서 점점 나는 보기 힘들어졌다. 회를 거듭할수록 '애엄마'라는 말이 내 귀에 콕콕 박혔다.
여기서 나의 TV 성향을 얘기하자면 나는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는 싫어한다. 어차피 저렇게 간절히 사랑해도 결혼하고 살면 다 똑같지. 저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한 때 모임에만 나가면 언급됐던 '태양의 후예'도 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반대로 뉴스도 잘 보지 않는데 험악한 사회 뉴스를 볼 때마다 내 일이 될까 걱정되서였다. 흉흉한 소식 위주로 전해주니 뉴스만 보면 집 밖으로는 한 발짝만 나가도 위험한 일 투성이었다. 남을 쉽게 믿는 착한 사람은 사기당하고, 아이가 혼자 놀다 험한 사고를 겪고, 학교 폭력을 심하게 당한 피해자를 보면 세상은 전혀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나는 걱정이 많고 예민한 사람이라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일 같았다.
남편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태연하게 볼 수 있을까, 나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해 봤다. 남편은 TV 속의 이야기는 남의 얘기라고 생각하고 그냥 즐긴다. 장면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재밌으면 웃고 슬프면 그렇구나 한다. 반면 나는 내 이야기처럼 느낀다. 그러니 그냥 즐길 수가 없다. 같이 아프고 같이 화가 나고 같이 사랑한다. 이런저런 감정을 다 느끼고 싶지 않으니 그냥 꺼 버린다. 보지 않으면 안 느껴도 되니까.
남편은 그저 저 사람들 불쌍하고 가족 간에 소통이 중요하다고 느꼈던 드라마의 내용이 나에겐 아프게 느껴졌던 건 내가 그 여자의 현실과 다르지 않아서 일거다. '애엄마'에 나이도 어느 정도 있으면 아르바이트도 문턱이 높은 게 현실이니까. 사회에서 낙오되는 것 같은 기분이 수시로 드니까. 이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이 드니까.
이건 기질적인 예민함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감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분명히 있을 거다. 둥글게 받아들인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온전히 느낀다고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사니까 나와 같은 사람들도 있겠지. 그저 남편과 내가 다를 뿐이다.
나는 앞으로도 뉴스나 드라마는 굳이 보지 않을 것 같다. 남들이 재밌다고 얘기하는 드라마 대신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들을 봐야지.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당신과 내가 다른 것을 인정합시다. 꼭 TV가 아니어도 우리가 공유할 아이템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