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려야 해!
어느덧 쿠알라룸푸르에서 맞는 세 번째 일요일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그 속도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괜히 생긴 아침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여전히 여유로운데, 나의 마음만 자꾸 하루를 앞질러 가는 것 같았다.
오늘은 드디어 Flow ride를 하러 가는 날이다.
작년에 할인되는 앱으로 조금 더 저렴하게 예매를 할까, 왓츠앱으로 정가에 예매를 할까 고민을 하다 체험 전날 왓츠앱으로 예약을 했었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기 때문이다.
분명 예약을 하던 전날 저녁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아침에 갑자기 구토를 하고 고열이 났고 체험은 당연히 취소해야 했다. 왓츠앱에서 사정을 설명하자, 별다른 말 없이 무료 취소를 도와주었다.
조금 아끼자고 할인되는 앱에서 예약을 했더라면 어떤 사정에도 취소가 불가였기 때문에 조금 아끼려다 많이 잃는 셈이 될 뻔 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왓츠앱으로 예약을 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자주 느끼는 점인데, 아이들 체험하는 곳에 가면 취소에 너그럽다.
온순한 이들의 성향이 서비스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언젠가 예약금과 취소 위약금이 생기지는 않을지 괜한 걱정도 들었다.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빌어본다.
작년에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드디어 다시 길을 나섰다.
여행 초반에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미뤘다.
영어학원 원장님이 “가끔 다쳐서 깁스하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여행의 중반을 넘기고 나서야 용기내어 예약을 했다.
이번에는 일행 중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모처럼 아이와 나, 단둘만의 외출이 되었다.
수영복, 네오플랜 수영복, 샤워도구까지 챙기며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Flow ride 입구에 도착했는데, 결제하려고 보니 카드가 없다.
늘 카드를 핸드폰 케이스에 넣어 다녔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내가 빼놨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서핑 짐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고 현금 쓸 일도 없을 것 같아 지갑도 두고 나왔다.
그랩은 자동결제라 체험료를 결제해야 할 순간이 오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당황하자, 직원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폰으로 온라인 결제가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직원이 카드 번호랑 CVC 번호만 있으면 제가 결제 도와드릴 수 있다고 했다.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남편이 해외결제 카드가 필요하다고 해서 찍어 보내준 카드 사진이 있었다.
제발 지우지 않았길 바라며 사진첩을 보니 다행이 그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갈 뻔했던 순간이 심폐소생 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서핑 시작.
처음 타는데도 아이는 너무 신나 보였다.
선생님은 자세를 하나하나 꼼꼼히 잡아주었다.
처음에는 배를 깔고 엎드리기, 그다음은 무릎을 꿇고 균형 잡기.
서서히 레벨을 높여 나갔다.
아이가 워낙 즐겁게 타자, 선생님이 서서 타는 것도 한 번 해보자고 했다.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거센 물살에 두 번이나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급격히 기분이 다운된 아이는 “서서 하는 건 안 할래”라며 다시 엎드려 타기로 했다.
그건 또 너무 재밌다며, 다음에 또 오고 싶단다.
작은 실패는 있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에 성공한 아이가 기특했다.
원래는 원우타마에서 맛있는 걸 먹고 천천히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돈도 카드도 없는 상태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랩을 타고 몽키아라로 돌아오는 것.
숙소에 짐을 두고, 아이는 굳이 Kanteen의 곰돌이 모양 팬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다.
배가 고팠지만, 굳이 10분을 걸어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 메뉴만 안 된단다.
아쉬운 대로 키즈 볶음밥과 와플을 시켰는데,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여기는 안 맛있는 게 뭐지, 대체.
글을 쓰는 지금도 그곳으로 다시 날아가고 싶다.
식사 후 돌아오는 길에 원숭이를 세 마리나 만났다.
너무 신이 난 아이는 한참을 서서 구경하다 돌아왔다.
며칠 전 발마사지의 맛을 본 아이는 전신 키즈 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서핑 후 피로를 풀기에 딱이다 싶어 예약을 했다.
그런데 왓츠앱으로 연락이 왔다.
마사지숍이 있는 건물에 불이 나서 오늘은 취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큰 불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이들이 마사지 받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직원들은 안전한지 물어보자 모두 안전하다고 했다. 다행이다.
갑자기 생긴 잉여시간도 나쁘지 않다.
오늘은 그냥 숙소에서 뒹굴거리면 된다.
오늘은 이곳에 왔던 아빠들 중 마지막 한 분이 KL을 떠나는 날이다.
로비에 모여 우리만의 의식, Farewell photo time을 가졌다.
아빠들이 모두 돌아간 밤, 우리 일행은 한 집에 모였다.
싱가포르에서 KL로 넘어올 때 면세에서 사온 와인을 여는 날이다.
엄마 다섯이 모이니 집에 있는 재료들로 뚝딱, 뚝딱 근사한 핑거푸드가 차려졌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게임하는 팀, 영화 보는 팀으로 나뉘었다.
이제 반절을 지나온 KL 생활 이야기, 앞으로 떠날 페낭 여행 이야기까지.
그렇게 수다의 밤은 무르익어 갔다.
그렇게 하루가 잘 마무리 되는듯 하였으나...
집에 돌아와서야 깨달았다.
아침에 가져갔던 가디건이 없다.
아이의 네오플랜 수영복도 없다.
온도가 어떨지 몰라 얇은 수영복과 네오플랜 수영복을 모두 가져갔는데, 얇은 수영복만 입어서 없어진 걸 몰랐다.
급히 왓츠앱으로 연락했지만, 읽씹이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겠다.
작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올해는 긴장이 많이 풀린 걸까, 아니면 그냥 정신이 없는 걸까.
올해는 아이 8명, 어른 5명.
총 13명이 함께 움직이는 여행이다.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 했고, 그 역할은 자연스럽게 한 번 와봤던 내 몫이 되었다.
외동인 딸아이는 친구와 동생, 오빠들이 많아 즐거워했지만 8명의 체험예약을 매번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엄마들 마사지 한 번 받으려 해도 다섯 명을 동시에 조율해야 하니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2주를 그렇게 살고 나니 혼이 조금 나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늘 북적북적하고, 재미있어하니 그걸로 되었다.
→ 가격은 티켓할인 사이트 보다 조금 더 비쌀 수 있지만 취소에 관대하다.
→ 사진 보관이 찝찝하면 메일함 또는 개인 클라우드에라도 저장해두길 추천한다.
→ KL은 Grab 사용이 편해 지갑 없이 다니다가 낭패 보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