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세속이슬람주의 (1/2)
최근 튀르키예 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한국에서도 피해 복구 인력과 지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디 빠른 시간 내 더 이상 인명 피해 없이 복구되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최근 문제가 된 튀르키예 지진복구지연과 함께 튀르키예 및 세속주의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우선 중동국가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국가들을 정치형태, 종교영향역 및 언어의 잣대로 나누어 보면 하기와 같이 4가지 큰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정치 형태로 왕정과 공화정으로 나눌 수 있고 (이란은 종교+공화정의 형태인 이슬람 공화정임)
2) 종교가 정치와 사회 전반에 관여가 되어 있는 이슬람주의, 분리가 되어있는 세속주의
3) 언어로 나눌 경우 이란어, 투르크어 및 아랍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슬람이 아니니 제외)
이번 글에서 이슬람 종교가 정치/사회와 분리되어 있는 세속주의 주요 국가인 튀르키예를 알아보고, 매우 유사한 역사적 / 정치적 행보를 가고 있는 이집트와 비교 분석을 다음 글에서 다뤄 보려 합니다.
튀르키예와 이집트, 두 국가는 하기와 같이 여러모로 매우 유사합니다.
- 유럽 등 열강에 뒤처지면서 전쟁에서 지거나 (튀르키예) 식민통치를 당했고 (이집트),
- 근대화에 뒤처진 원인을 부패한 왕정과 종교에서 찾았고, 군부에 의해 공화정이 수립되고 종교를 정치/사회에 분리하여 세속주의 이슬람을 표방합니다.
- 최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이슬람주의로 회귀하려 하면서 많은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인지하면서, 최근의 정세를 보시면 중동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번에는 글이 좀 길어서 두 번으로 나눠 쓰도록 하겠습니다.
1. 튀르키예, 케말주의에서부터 오늘날 신오스만주의까지
2. 이집트,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의 성공과 비애
아울러 이를 통해서 아래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보려 합니다.
튀르키예 지진 복구 지연과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로의 회귀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집트는 아랍의 봄 이후 군 장기 독재자였던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하고, 2012년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지금의 튀르키예와 동일하게 세속주의 → 이슬람 주의로 회귀가 먼저 추진되었었습니다. 그 결과와 현재 튀르키예 상황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오늘은 우선 튀르키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근대 튀르키예는 크게 하기 3가지를 이해하시면 쉽게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 케말주의(세속주의), 귈렌주의 (온건 이슬람주의) 및 신오스만주의 (이슬람주의)
튀르키예 포스팅을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다, 지난번 이란과 같이 영화로 시작을 하려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튀르키예의 황금기는 오스만제국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후 확장한 영토가 튀르키예의 가장 번성했던 역사적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2012년 튀르키예 영화로, 한국에도 개봉이 되었었습니다. 저는 케이블 TV에서 우연히 봤었는데, 튀르키예 영화답게 국뽕이 심했지만, 말로만 듣던 거대한 우르반 대포나, 배를 분해해서 산을 넘는 장면, 골든혼 입구를 막는 쇠사슬, 테오도시우스 공성전 등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신이 났었습니다. 튀르키예 여행 전에, 이스탄불 지리 및 유적들을 이해하기 위해 강추드리는 영화입니다.
1453년 이후 오스만제국은 영토확장에 치중해서, 하기 지도의 파란 선 즉 중동, 소아시아, 발칸반도, 북아프리카등 대 영토를 점유하게 됩니다. 종종 오해하시는 게, 이 지역이 모두 이슬람이나 아랍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세계사에서 배운 "밀레트"라는 제도를 통해 "지즈아"라는 세금을 납부하면, 그지역의 종교, 언어, 문화를 인정해 주는 정책을 썼었습니다. 무슬림에게는 지즈야가 면제되었고, 기독교, 정교회, 유대교 등 비 무슬림인들은 세금을 내면 종교 공동체끼리 생활에 전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이때 오스만제국이 이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을 강요하지 않은 이유가, 모두 무슬림화가 되면, 걷게 되는 지즈야 세금액이 감소하여 오히려 개종을 꺼려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를 중심으로 밀레트를 구성했고, 당시 동방정교, 기독교, 유대교,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트교, 시리아 정교회 등등 17개가 넘는 밀레트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이 레콩키스타를 통해 개종 또는 추방시킨 유대인들의 많은 수가 오스만의 땅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오스만제국 치세의 점령지는 근대 제국주의의 식민지와는 개념이 틀립니다.)
방대한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설명보다는 하기 순서로 중요 이벤트 위주 알아보겠습니다.
1) 오스만제국의 쇠퇴기 (18세기 이후)
2) 근대 터키독립 (1923년, 세속 민족주의 표방 )
3) 현재 에르도안 체제 (현재, 신오스만주의 표방 )
※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와 유사점과 차이점도 있어서 중간중간 비교도 해보겠습니다.
오스만제국은 16~17세기 황금기를 이후로, 18세기 이후부터는 쇠퇴기로 들어갑니다.
1683년 2차 빈 공방전에서 패배하면서, 강력했던 오스만제국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공포감이 사라지게 되었고, 18세기부터 부동항을 위해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과 13차례 전쟁에서 대부분 패하게 되고, 위에서 지도와 같이 계속해서 유럽 및 러시아에게 영토를 상실하면서, "유럽의 환자"라고 조롱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환자로 전략한 이후 유럽국가들은 오스만제국에게서 새로운 공포에 시달리는데, 이는 오스만제국의 멸망에 대한 공포였다고 합니다. 오스만이 멸망할 경우 러시아가 이익을 독점하여 유럽대국의 세력균형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시, 친독파였던 술탄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굳이 연합군이 아닌 동맹군 독일과 함께 참전하고, 패전하면서 오스만제국은 하기와 같이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1. 광활한 영토의 상실 (위 지도 참고)
2. 다르다넬스, 보스포로스 양 해협 및 마르마라 해에 대한 권리 박탈 (국제적 개방)
3. 국토 내 외국군 주둔 및 치외법권 인정
* 이는 구한말시대 조선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기도 비슷하네요.
올해가 터키 독립 100주년입니다. (당시 국명이 터키였으니, 그대로 표기하겠습니다)
19세기말 거대제국 오스만이 쇠락하던 시절, 젊은 장교들과 사관생도들은 "청년 튀르크"를 결성하고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 전통에 사로잡혀 근대화에 뒤쳐진 것이 제국의 쇠락의 직접적인 이유라 규정했습니다.
광대한 제국이 작은 아나톨리아 일대로 영토가 축소되는 수치를 당한 "청년 튀르크"는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화와 근대화만이 생존의 길임을 절감합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무스타파 케말"입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으로, 1920년 이후 터키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현재의 튀르키예 영토를 확보하게 됩니다.
- 1차 세계대전 이후 세브르 조약에서 하기와 같이 쪼그라진 영토만이 남게 되었는데,
- 그리스가 아나톨리아를 차지하려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이를 잘 막아내면서, 이스탄불, 이즈미르 및 아르메니아 지역을 회복하였고 현재의 하기 주홍색 영토를 확보하게 됩니다. (로잔조약)
그리고 무스타파 케말의 주도하에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게 됩니다.
(케말은 이슬람에 대해 치를 떨었고, 1922년 술탄제를, 1923년 칼리프 제도까지 폐지하게 됩니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이 추진한 것이 "케말주의 또는 케말리즘"입니다.
그는 터키공화국을 수립하고, 서구민주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한 세속주의 국가로 변신을 하게 됩니다. 하기 "6개의 화살"로 불리는 체제변혁이 케말리즘의 핵심이자 터키공화국의 기본체제입니다.
당시 유럽의 민족주의 국가들이 부강해지는 것을 목격한 케말은, 기존의 오스만제국의 광활한 다민족 국가에서 튀르크 민족의 국가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는 튀르크 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이미 위대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때부터 터키의 외교 방향이 아랍을 무시하고, 유럽을 향하게 됩니다. (EU 가입도 동일 맥락입니다.)
케말리즘 하에서 주요 개혁 방향은 하기와 같습니다.
- 터키와 그리스에 섞여 살고 있는 터키인과 그리스인을 맞바꾸면서, 터키 땅내의 투르크 민족의 비중 확대
- 일부다처제 금지, 복식개혁, 유럽법제 도입 ( 터키의 여성참정권 도입은 프랑스, 스위스보다 빨랐음)
- 아랍문자를 라틴문자로 대체하는 문자개혁 추진 - 이는 문맹률을 낮추는 목적 및 결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세속주의 및 민족주의 목적도 있었음. 꾸란은 아랍어로만 출판 및 읽어야 하나, 터키는 이를 터키어로 진행했음.
- 민족주의를 위해 최초로 성(Surname)을 도입함. 아랍에는 성이 없었으나, 최초로 성을 도입하면서 무스타파 케말이 국회로부터 "아타튀르크" 터키의 아버지라는 영구결번의 성을 얻게 됩니다. (케말은 자식이 없기 때문) 현재 튀르키예 공항이름이 "아타튀르크" 공항일 정도로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케말은 외교정책에서 "조국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라는 모토로 철저한 중립노선을 고수합니다.
- 국제연맹가입, 1차 대전 적국인 영국,프랑스,러시아, 및 최근 전쟁을 한 그리스등과도 우호 관계를 맺고
절대적으로 중립노선을 지켰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유지도 앞으로 올 전쟁에서 절대 중립을 지킬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터키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 피해를 최소화하게 됩니다.
- 소련 스탈린의 압력이 커지고, NATO 창립이 되자 (1949) 터키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이때부터 친미 국가가 됩니다. NATO 가입을 위해 6.25 전쟁에서 4번째로 많은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게 됩니다.
이후 터키는 냉전시대에 대외정책에 있어서 하기와 같이 일관된 정책을 고수합니다.
1. 친미 반소 정책
2.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NATO 회원국의 역할 충실히 수행
3. EU가입을 위한 노력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가 그러하듯, 케말 사후 군부는 개혁의 시대정신을 내려놓고 권력을 탐닉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다시 이슬람과 전근대로 회귀한다는 자만심으로 넘치게 됩니다. 1950년 군부에서 민정으로 전환후 군부는 끊임 없이 정변을 시도했고, 현대에도 군부주도의 네 번의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국가나 조직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인물이나 기관대신에, 그 막후에서 이들을 지배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나 기관을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 또는 딥 스테이트 (Deep State), 비선등으로 부릅니다.
튀르키예에서도 엘리트 군부, 사법조직 수장, 공공기업의 수장, 언론재벌, 범죄조직등으로 구성된 비밀조직인 "에르게네콘"이 존재해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군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막후에서 언제든 영향력을 행사하고, 쿠데타를 통해 국내 정치에도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케말리즘"은 에르도안 정권이 들어서면서 흐림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2002년)
현 에르도안 대통령은 1994-1998년 이스탄불 시장 시절 쓰레기, 물부족, 공해 문제등을 해결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2002년 터키 총리가 되면서 처음 10년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기간 동안 터키는 무디스로부터 20년 만에 투자적격 등급을 받았고, 평균 7.3%의 경제 성장과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완화시켰으며, 국가부채 또한 GDP의 100%에서 30%까지 하락시키는 성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아랍 젊은이들로 부터 롤모델로 추앙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뼛속까지 이슬람주의자였습니다. 야당 당수 시절에 민주주의를 이슬람주의라는 역에 도착하면 내려야 할 열차에 비유했던 사람입니다. 2013년 터키 반정부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그 실체가 드러났고, 이후 지속적인 삽질과 함께 경제성과가 나질 않자,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명목으로, 서방세계와 대립하고, 중동의 각종 분쟁에 개입하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쿠르드족에 대한 과잉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신 오스만주의 Neo Ottomanism"이라 부릅니다. 기존의 "케말리즘"과 역행하여 세속주의 보다 이슬람주의를 강조하면서 히잡착용등 복장등 규정을 강화하고, EU가입을 포기하고, 대신 아랍 및 이슬람 지역에 대한 관심 및 개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카파르, 리비아 등 아랍국가 파병을 통한 개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르도안 정권초기부터, 아까 설명드린 군대를 조정하는 Deep State인 "에르게네콘"을 색출 및 무력화하기 위해 펫훌라흐 귈렌 (온건 이슬람주의)과 손을 잡습니다.
귈렌은 이슬람주의자이지만 세속국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시장주의를 옹호하는 온건 주의자입니다. 그는 서방문물의 적극적 수용,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중시하고, 교육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사상을 "귈렌주의"라고 부릅니다.
※ 그는 한국에도 레인보우국제학교(RIS)등 3곳이상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2013년에는 종교의 화해와 국경을 초월한 봉사를 인정받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나중에 터키의 정관계, 사법부, 언론등으로 진출해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에르도안은 이를 활용 터키 내 "에르게네콘"을 색출 및 교체하는 작업을 통해, 군부 힘 빼기에 들어갑니다.
2010년 대규모 쿠데타 음모를 적발하여, 군부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면서 대통령에 오른 에르도안은 권력을 강화해 나가게 됩니다.
2013년 탁심 게지공원 시위와 아들의 부패 스캔들로 에르도안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들의 부패 스캔들은 에르도안과 틀어진 귈렌이 폭로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도시의 지식인, 학생, 군부는 에르도안을 독재자로 비난했지만, 농민 들과 서민들은 에르도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2016년 귈렌이 주도했다는 군부 쿠데타도, 결국 에르도안 지지자들이 거리를 메우면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이후 쿠데타 주동자들을 처벌하면서 에르도안의 입지는 한층 강화되었고, 이에 대해 케말파샤의 터키공화국이 술탄 에르도안의 신오스만 제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의 말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5월 에르도안 대통령의 마지막 선거가 있습니다. 승리하면 2028년까지 대통령직에 있을 수 있고, 그러면서 그의 꿈인 신오스만제국이란 이슬람주의 국가로의 회귀를 추진할 것입니다.
야당에서도 6개 정당이 연합하여 단일 후보를 내놓고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바, 선거 결과가 기대되는 상황입니다. 에르도안 현 대통령도 최근의 경제침체와 비정상적인 환율개입, 튀르키예 지진대응지연등으로 쉽지 않은 선거가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최근 들어 튀르키예의 경제 상황 악화, 지진에 대한 대응 부실등으로 에르도안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한 상황입니다. 5월 대선을 위해 정부에서 적극적인 환율 개입을 하여 올해 터키리라화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보이나, 대선 이후는 다시 현지화가치 급락이 예상되는 상황입니다.
튀르키예 지진관련해서는, 군대의 투입결정이 늦었다는 게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재난 상황에서 튀르키예 군은 자동적으로 투입하여 구호 활동을 펼치는데, 이번에는 그런 활동이 없었습니다.
군대의 투입 지연의 가장 큰 원인이, 군부 내 주요 인사 숙청 및 세력의 교체입니다. 재난시 선조치 후보고의 군조직의 규율은 사라지고, 에르도안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이지 않는 조직이 되었다는 중론입니다.
한국에서도 재난에 대한 늑장대응으로 많은 이슈가 되고 있는데, 튀르키예도 유사한 원인으로 참사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많이 아쉽습니다.
오늘은 세속주의의 선봉 튀르키예가 걸어온 발자취를 알아봤습니다. 다음에는 데자뷔와 같은 이집트의 세속주의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왜 이집트가 아랍세계에서 형님이라 불리다, 지금은 바닥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설명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