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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방아저씨 Apr 07. 2023

이집트 나세르, 세속이슬람주의와 범아랍민족주의를 이끌다

중동의 세속이슬람주의 (2/2 전편) 


지난번 포스팅에서는 이슬람주의와 대치되는 세속주의에 대해 소개를 드리면서 튀르키예의 케말파샤에 대해 말씀드렸었습니다.   

※ 참고로 "세속주의"에 대한 위키백과의 정의는 하기와 같습니다. 

세속주의는  종교의 자유를 주장함과 동시에 믿음에 관한 것들로부터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가에 의한 종교적 강요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고종교에 대해 국가적인 특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즉, 인간 활동이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종교에 의해 간섭받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사실에 기반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세속주의이다.


중동에서 세속주의의 대표적 국가는 튀르키예와 이집트입니다. 각각 1920년대와 1950년대 당시 부패하고 폐쇄적인 이슬람에서 종교를 정치와 사회생활을 분리하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서방 체제와 문물을 받아들인 개방정책을 펴면서, 빠른 성장과 함께  주변 아랍 국가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면서 큰 형님 또는 롤 모델로 급 상승 했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선정하는 100인의 위인에도 당시 케말파샤 (튀르키예)와 나세르(이집트)가 선정되었었습니다.  어렸을 땐 별생각 없이 지나쳤었는데, 지금 보니 반갑습니다. 

삼성당 세계위인전기 전집 (케말파샤와 나세르 포함)

지난번에 튀르키예의 세속이슬람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  케말파샤를 알면 이집트는 이해하기 쉽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국가가 19~20세기 처한 상황이 유사했고, 해법으로 추구한 세속주의, 공화정 전환 및 민족주의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난 포스팅에 연장선으로 오늘은 2번째 이야기인 이집트의 나세르주의를 알아보겠습니다. 


1. 튀르키예, 케말주의에서부터 오늘날 신오스만주의까지

2. 이집트,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의 성공과 이후 (한때는 큰 형님, 지금은?) 



:

십여 년 전에, 저희 회사는 이집트에 생산공장 진출을 검토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 정부가 적극적인 외국기업 특히 공장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생산 및 수출 장려금 등 유치 조건이 좋아서 긍정적으로 추진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발목을 잡았던 게,  주변 아랍국에서 절대 "Made in Egypt" 제품은 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방글라데시 등 개벌도상국의 제품은 몰라도, 이집트산은 소비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주변 아랍 국가들의 이집트에 대한 불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편의상 고대 및 중세 이집트 역사는 건너뛰고, 곧장 오스만 제국 시기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난 튀르키예 포스팅과 비교하면서 보기 좋을 것 같습니다. )


 1) 이집트의 근대사 (1517 ~ 1952)   


 - 오스만 제국 점령기  (1517~1867)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15~16세기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오스만제국은 1517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약 350년인 1867년까지 제국의 영향권 내에 놓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의 주요 세력은 1) 오스만 제국 세력, 2) 이집트계 맘루크 계급, 그리고 3) 알바니아계 상인들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음)이었습니다. 

  ※ 여기서 맘루크 계급은, 살라흐 앗딘 으로 유명한 아이유브 왕조가 끝난 이후, 군인 계급이었던 맘루크 계급이 1250년부터 정권 및 정계를 장악하게 되는데,  이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하면서도 세력이 유지되었습니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1798년 이집트를 침공해 점령했으나,  나폴레옹이 워터루 전투에서 영국에게 패하면서 이집트는 권력 공백 사태가 되었고,  이때 오스만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파샤 (알바니아계)가 정권을 잡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집트 총독 직위를 얻으면서 독자적인 이집트를 이끌어 나가게 됩니다.  알리파샤는 정권을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성가시던 맘루크 계급들을 집단 숙청한 뒤 새로운 왕조를 세웁니다. (알리왕조 1820~1952)


당사 알리퍄샤는 수단 북부, 시리아, 아라비아반도 및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이집트로 편입했고,  서구 강국으로부터 허약한 오스만제국을 집어삼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사게 됩니다.  이집트는 1867년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의 지위 (Khedivate)를 얻게 되었고,  1914년 오스만제국은 파탄 나게 됩니다.  



 - 수에즈 운하 (1869 개통) 


고대부터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에 대한 시도는 많았습니다. 파라오 제12 왕조 (BC 1878~1839)를 시초로 18 왕조, 26 왕조 때 운하 건설을 추진했었고,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BC522~486) 때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천여년간 외세 또는 반란군을 막기 위해 파괴와 보수가 반복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833년부터 프랑스 지식인 그룹이 카이로에 도착하여 운하 착공을 추진하였으나, 당시 무함마드 알리파샤와 영국의 반대로 진전이 안되다가, 1854년 총독에 부임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의 승낙을 받아, 이집트에 법인을 세우고, 주식을 발행하여 프랑스가 20만7천주, 이집트의 태수가 17만 7천주를 인수하고, 1859년 기공식을 치렀습니다.  영국의 방해 등 우여곡절 끝에 10년 만인 1869년 성대한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인해 만들어 놓은  작품을 운하 개통 후 2년 뒤 187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카이로에서 초연되었었습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축하를 위해 베르다가 작곡한 "아이다"


※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인해, 런던에서 뭄바이까지의 항해 거리 19.8천Km에서 11.6Km로 약 8천Km (41%) 단축되게 됩니다. 선단이 운하를 통과하는 평균 시간은 약 15시간이 걸리고, 평균선박당 25만불의 운하 이용료를 내고 있습니다.  2009년 기준 22,183척의 배가 운하를 사용했고, GDP의 1.3%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운하 개통 2년 만에 유럽에서 발발한 보불전쟁 (프로이센 vs 프랑스)에서 프랑스가 패하게 됩니다.  운하 건설로 인해 외국에 엄청난 빚을  지고,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경제적 파산 위기에 몰린 사이드파샤는  패전국인 프랑스로부터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자 보유한 주식 17만주 전부를 영국에 팔게 되면서, 운하의 운영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1875). (당시 영국은 식민지 인도로 가는 최단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운하가 매우 필요했습니다.)



 - 영국의 지배 (보호령) (1882~1922)  


 사이드파샤의 경제적 파산 위기와, 전염병 등 자연재해로 국민들의 왕조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1882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이집트를 침공하여 사실상 보호령으로 만들게 됩니다.


1차 대전에 이집트는 오스만제국의 편에서 연합군과 전쟁을 하게 되고,  승전국인 영국은 이집트를 완전한 영국의 보호령으로 귀속시킵니다.    1차 대전 이후, 튀르키예와 같이 민족 자결주의 열품이 이집트 내에서도 불게 되고,  국민들의 영국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도 어쩔 수 없이 1922년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해 주게 됩니다



- 이집트 왕국 (1922~1952)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이집트 왕국"으로 국명을 바꾸었지만, 여전히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6년 "앵글로-이집트 조약"을  맺어 영국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을 제외하고 이집트 전역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영국에 있어서 이집트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교두보이자, 인도/오스트리아로 가기 위해 수에즈 운하가 절실했기 때문에 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는데, 이집트는 터키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끝까지 중립을 지킵니다.  

날이 갈수록 영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이집트인들의 반영 감정은 커져만 갔습니다. 이후 1951년 이집트가 일방적으로 "앵글로-이집트" 조약에서 탈퇴하고, 영국군을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당연히 영국은 이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1952년 이집트는 영국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쳤고,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당시 파르크 국왕은 국민들의 반영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총리를 해임하는 등 대응을 했습니다. 


드디어 1952년 7월 22일,  무함마드 나기브와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정제를 해지한 뒤 1953년 공화정을 선포했습니다.  나기브 장군이 초대 대통령으로, 나세르가 초대 총리로 취임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실권은 군부에게 넘어가고,  모든 정당을 금지시켰으며,  초대 대통령 나기브 장군은 혁명의 실세였던 나세르에게 1년 반 만에 강제로 하야하고,  선거를 통해 1956년 나세르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2) 이집트의 현대사 (1953 ~ )      


길지만 이집트의 근대사를 정리하고, 마지막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를 보셨습니다.   청년 투르크당의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로 공화정을 만든 당시 환경과,  이집트에서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만드는 장면은 30여 년의 시간 공백이 있지만 마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습니다. 


튀르키예와 이집트의 현대 공화정의 실세인 케말 아타튀르크와 가말 압델 나세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당시 부패한 이슬람 왕정체제하에서 영국 등 유럽 열강에게 뒤처지면서 패전 또는 보호통치를 받았고, 유럽의 민족주의 국가들의 성공사례 (영국, 프랑스 등등)를 보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이 싹트게 됩니다. 


케말은 투르크 민족주의를,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더 이상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여기서 케말은 아랍에서는 더 이상 도움이나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여 방향을 유럽으로 틀었고(탈아랍/ 입구주 - 탈아입구),  나세르는 법 아랍 민족주의를 제창하면서 중동 내 아랍국가들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단결을 호소하게 됩니다.   두 인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시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케말 아타튀르크 vs 가말 압델 나세르의 비교

  

나세르 대통령 시기 이집트 현대사를 들어가기 전에,  이집트 만의 독특한 정치 역학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이집트의 주요 정치 행위자는 크게 1) 군부  2) 무슬림형제단  3) 콥트교회입니다. 


1) 군부  


1952년 군부 쿠데타 이후,  2012년~13년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제외하면, 지금까지도 군부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주의,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장기독재를 지속해 오고 있으며,  무슬림 형제단 출신 대통령인 무함마드 무르시를 1년 만에 하야시킬 정도로 아직도 실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 무슬림 형제단 (Muslim Brothers, MB)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근본주의의 초기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이 이집트에서 결성됩니다.  

이집트 사회운동가 하산 알 반나는 1920년대 초 터키에서 아타튀르크가 세속주의 정권을 만든 것에 큰 충격을 받고 1928년 무슬림 형제단을 결성합니다.  1940년대 이슬람 운동이 성장하면서 팔레스타인, 시리아 같은 주변지역으로도 확산 되게 됩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1952년 이집트 왕정 타도에 참여했지만, 군부 출신 나세르 대통령이 이슬람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세속주의=반이슬람주의를 기조로 내걸면서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나세르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을 해산시키고 체포, 투옥하고 사디드 쿠틉같은 혁명 지도부를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처형당한 사이드 쿠틉은 20세기 이슬람 극단주의의 아버지로 영웅시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이후 그들을 받아주는 사우디로 넘어가서, 이슬람주의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무자헤딘, 알카에다, IS 등으로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 하산 알 반나를 마르크스라고 하면, 사이드 쿠틉은 레닌 (혁명가)으로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이슬람의 권위를 동시에 주장합니다. 즉  민주주의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샤리아의 전면적인 시행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에 반하지 않으면서 삼권분립, 의회 민주주의, 평화적인 정권교체 등을 추구하는 것이죠. 겉으로는  온건주의 느낌이지만 집권 후 만행, 테러와 소수자 박해를 보면 온건한 정당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무슬림 형제단은 최근의 과격 무장단체들의 전신으로,  따로 포스팅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산 알 반나(1906~1949) (좌),  사이드 쿠틉(1906~1966)(우)


3) 콥틱 정교회 (Cotic Orthodox)  


로마시대 이후 AD42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져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콥틱 정교회는 교파로 볼 때 하기 그림의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하고, 451년 칼테든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비칼케돈 교파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다른 신학적 배경 지닙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시리아 정교회 등이 같은 교파입니다.   7세기 이슬람화 되기 전까지 이집트는 기독교 비중이 컸고, 언어도 그리스어와 콥트교가 양분되어 사용되었었습니다. 

이집트 인구의 10% 정도가 콥틱 정교회 기독교인들이며, 정치적으로 협력과 탄압을 번갈아 가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주요 교파 (오리엔트 정교회에 속하는 콥틱 정교회)
이집트의 기독교인 인구 및 거주지


하기에 보시는 것과 같이, 각 정부에 따라서 적절하게 무슬림형제단과 교회와의 협력과 탄압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활용하고 있습니다.   군부는 기본적으로 세속주의 이념 때문에 무슬림형제단을 탄압하지만,  사다트 대통령만이 유일하게 협력 관계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포용력을 보여주려는 의도) 


이집트 정권 이동에 따른 무슬림형제단, 교회와의 역학관계 변화 (Diverse+Asia)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는데, 

이집트 현대사는 두 번에 나누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게 나세르 치적과 그 이후의 내용들이다 보니,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개인적으로 나세르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래의 "에어리어 88"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생각납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주도한 중동 전쟁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많았거든요.  실제로 중동전쟁의 장면들이 모티브가 되었고, 최근 탑건 속편의 일부 내용이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동전쟁은 크게 1~4차로 나뉘는데, 다음 이집트 포스팅에서는 간략히 넘어가고,  시간을 내서 별도로 포스팅하겠습니다.  

에니메이션 "에어리어 88"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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