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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방아저씨 May 21. 2023

이집트 나세르, 중동전쟁과 아랍연합공화국

중동의 세속 이슬람 주의 (2/2 후편)


지난번 글에서 이집트 현대사를 얘기하다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이집트를 2번으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사실상 지난번 이집트 근대사와 현대의 주요 정치세력에 대한 설명은 나세르주의와 현대사를 설명하기 위한 애피타이저 성격이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이집트 현대사 이야기를 계속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2 후편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1. 튀르키예, 케말 주의에서부터 오늘날 신오스만주의까지 (1/2)

2. 이집트 나세르, 세속 이슬람주의와 범아랍민족주의를 이끌다 (2/2 전편)  

3. 이집트 나세르, 중동전쟁과 아랍연합 공화국 (2/2 후편)


나세르 대통령과 나세르주의(Nasserism)를 설명하려면,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얘기를 해야 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중동전쟁은 할 말이 많기 때문에 별도의 글을 준비하고 있고, 오늘은 이집트의 관점에서 간략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 바람이 중동 내에서 거세지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발현하는 아랍연맹 국가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UAR 이란 국가명을 들어 보셨는지요?  우리에게 친숙한 UAE (United Arab Emirates)가 아닌 당시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연합하여 세운 UAR (United Arab Republic)입니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도 이번에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쟁과 아랍연합공화국 

1) 범 아랍민족주의 발현 (By 이집트) 


중동의 세속 이슬람주의를 얘기하면서,  그 중심에 튀르키예와 이집트가 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당시 중동에서는 민족주의를 통해 팽배했던 오스만제국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튀르키예는 오스만의 광활한 다민족의 영토를 포기하고 투르크족을 중심으로 투르크 민족주의가 발현했고,  이란은 페르시아계이므로 그들만의 세속주의 열풍이 불었는데, 팔레비 국왕이 추진한 백색혁명입니다. 중동에서 투르크와 페르시아를 빼면 남은 것이 아랍 민족들인데, 말씀드린 대로 범아랍 민족주의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발현합니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세계사를 배울 때 처음으로 접하는 게 "세계 4대 문명"입니다. 이중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배울 때 이들의 차이점에 대해 별도로 배울 정도로, 두 문명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를 아랍이라고 칭하는 게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의문이 들었었습니다.  


아랍 국가를 나눌 때, 중요한 것이 아랍어의 사용 여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슬람이전 아랍어는 아라비아반도 남서부 부족들의 언어였습니다. 이 부족들이 이슬람을 앞세워 영토를 확장하면서 아랍어가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지역에서는,  신문등의 언론, 문서작성등 공적인 상황에서는 표준 아랍어를 사용하고, 일상 회화는 기존의 고유 언어와 아랍어가 섞인 말을 쓰는데, 이를 "아랍어 방언"이라 합니다.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방언이 일상생활에서 사용됩니다. 이슬람전 이집트에서는 행정적으로는 그리스어를, 일상생활에서는 콥트어가 사용되다가,  이슬람 이후에는 행정적으로는 표준아랍어를, 일상생활에서는 콥트어와 아랍어가 섞인 이집트 방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군소국가의 경우는 별문제가 없으나, 총 아랍 국가 4억의 인구 중, 1억을 차지하는 이집트의 방언이다 보니, 이집트 방언은 아랍 세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울러 이집트 방언으로 제작되는 이집트의 영화, 드라마들이 아랍 세계에서 인기가 있고,  이집트 인들이 주변 아랍 국가에 노동자로 많이 일하고 있어서, 이집트 아랍어 방언은 인지도가 높습니다) 


이집트는 오랜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나,  아울러 이슬람 이전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을 추구하는 이집트인이라는 정체성도 병존했습니다.   현대 들어 아랍 민족주의와 이집트 민족주의가 함께 대두 외었으나,  강렬한 아랍민족주의자인 나세르에 의해 이집트 민족주의는 쇠퇴하게 되고, 아랍민족주의에 집중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이집트 왕정을 중단하고 민족주의 공화정으로의 개혁을 위해, 이집트 민족주의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단, 나세르는 이집트 아랍어의 사용과 이를 활용한 문화 컨텐츠 제작은 장려하였습니다.) 




2) 나세르 주의 (Nasserism : 범 아랍 민족주의) 


1952년 자유장교단이 주도하는 군부 혁명으로 이집트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고,  혁명 주도자이며 실세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가 1956년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범 아랍민족주의를 주장하던 나세르는 그간 부패했던 이집트 재건에 들어갑니다.

나세르의 치적 중 하나는유연한 실리주의 외교력입니다.  (이는 튀르키예의 무스타파 케말과 비슷합니다.)  기존 이집트왕국이 영국중심의 사대외교를 했었다면, 나세르는 아스완 땜 구축등 산업 재건에 필요한 비용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무기는 소련으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을 받는 등 당시 냉전시대에는 획기적이었던 실리주의 외교를 했습니다.


여기서 이집트에 있는 아스완 댐 (Aswan Dam)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이집트를 위임 통치하던 영국은 1889년부터 나일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댐을 쌓기 시작하는데, 1991년에 완공이 되고 이를 후대 아스완 하이댐 (High Dam)과 구분해 아스완 로댐 (Low Dam)으로 부릅니다.  이후 이집트 인구는 계속 늘어났고, 나일강을 좀 더 안전하게 활용 및 통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세르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추진하고,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이끌어 냈는데, 초기에 지원을 하던 서방국가들은 나세르가 1) 소련과 무기협정을 맺은 것과  2) 아랍사회주의를 내세워 아랍권을 규합하려고 하자 원조를  중단합니다.  


결국 이 댐은 60년대 소련의 도움을 받아 건설이 시작되었고, 10년 후인 1970년 7월21일 완공됩니다.  비용을 소련이 지원했기 때문에 준공 기념탑에는 아랍어와 러시아어가 같이 쓰여 있습니다. 

 ※ 참고로 아스완댐은 중국 싼샤댐, 미국 후버댐과 더불어 세계 3대 댐으로 꼽히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집트 전역에 전력 공급이 가능해졌고, 현재 이집트 전체 전기 소비량의 30%를 차지합니다.  아스완댐은 길이 3,830m, 높이 111m, 면적 5,300km로  소양강댐과 비교하면  길이 520m, 높이 123m, 면적 70km 이므로, 그 규모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아스완 하이댐 (NASA  위성사진 좌측,  구글맵 우측)


소련으로부터의 무기협정으로, 미국, 영국이 이집트에게 등을 돌린 이 후,  나세르는 영국에 의해 운영되던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지난번 설명드린 것처럼, 1875년 이집트 왕실은 보유한 주식을 영국 전량 매각하면서 운하 운영권이 영국으로 넘어갔었습니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면서, 향후 운하의 수익금을 통해 주식대금을 갚아 나가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영국/프랑스등 서방에게 이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은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3) 중동 1~3차 전쟁  (이스라엘 vs 아랍국가들)  


아랍국가 내에서 나세르의 입지는 중동전쟁을 떼어놓고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중동전쟁 중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1~4차 중동전쟁에 대해 하기에 간략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를 이집트의 나세르 입장에서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동전쟁의 양상변화 (출처:  한겨례21  2014.9월29일자) 


 ▶ 1차 중동전쟁 (1948년 5월15일 ~ 1949년 3월 10일) 

 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독립직후에 발발해서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대 아랍 5개국이 붙은 전쟁으로 흔히 아랍군이 더 많았다고 오해를 하는데, 이스라엘은 초기부터 3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고, 전쟁 후반기 10만명으로 증강했지만,  아랍군은 초기에 소수의 원정만 보내면서 성의 없이 싸웠기 때문에 오히려 이스라엘에 비해 숫적 열세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는데,  아랍국들이 피상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위한 명목으로 군을 파병했지만, 사실상 유엔 분할 안에 배정된 아랍 영토를 자신의 영토로 합병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집트는 가자지역, 요르단은 서안지역)  무엇보다, 아랍 연합군의 핵심인 이집트의 군부가 성의 없게 싸우게 되는데, 그 이유는 왕정을 쫓아내고 공화정을 추진 중이었던 군부가 전쟁에서 승리해서 당시 이집트 왕정의 인기를 올려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2차 중동전쟁 (1956년 10월29일 ~ 1956년 11월7월)

위에서 설명드린 대로  나세르 대통령이 취임하여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반발하게 되고, 이스라엘도 1차 중동전쟁 후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게 됩니다.

영국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가 국유화한 것에 분노했고, 프랑스는 당시 식민지였던 알제리 반군을 아랍민족주의라는 미명하에 나세르가 지원하는 것을 탐탁지 안게 생각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꼬드겨서 함께 이집트와 전쟁을 추진합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이 참전하는 대가로, 개발 중인 핵무기 기술을 이스라엘에 이전을 제안합니다.  (향후 프랑스는 1960년, 이스라엘은 1966년 핵보유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집트와 영/프/이스라엘 3국가의 전쟁이 2차 중동전쟁이고, "수에즈 위기 또는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이스라엘은 기갑부대를 위주로 시나이 반도를 일주일도 안되어 점령을 하게 되어 조기에 승기를 굳힙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자신들과 상의 없이 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냉전시대였던 당시 미국은 서방국의 전쟁개입으로 아랍국가 내에서 소련의 입지가 커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집트와 우방인 소련이 핵폭격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영/프/이스라엘에 점령한 시나이 반도의 반환을 요청하면서,  요청 불응 시 미국은 소련이 무력을 (즉 핵공격) 사용해도 영국 프랑스를 돕지 않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즉 이 국가들을 NATO에서 제외하겠다고 압력을 가했고, 영국/프랑스에 대한  석유제재까지 가하게 됩니다.  

중동전쟁 2차전 수에즈 전쟁 시 이스라엘 군의 진격도


결국 영/프/이스라엘은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면서,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즉 전쟁을 일으키고도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 이후,  영국/프랑스는 미국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독자적인 핵전력 개발에 착수하고 핵보유를 하게 됩니다.  (이후 이스라엘도 프랑스의 약속 이행으로 핵보유를 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집트의 나세르는 전쟁에서 패하고도,  어부지리로 시나이 반도를 탈환하고, 영/프/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아랍 민족주의의 단결과 이집트의 패권차지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나세르는 이 전쟁으로 아랍국가 내에서 아랍을 구해낸 영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중동 2차 전쟁후 다마스커스 연설(좌측), 시민앞에서 연설하는 나세르 (우측)


▶ 3차 중동전쟁 (1967년 6월5일 ~ 1967년 6월10월, "6일전쟁")

2차 중동전젱에서 패전하고도 정치적인 승리를 거둔 나세르는,  지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게 됩니다.  당시 아랍에서는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한 반 이스라엘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세르가 반 이스라엘 명분만을 정치적으로 챙기면서도, 실제로는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돕지 않는다는 불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세르는 미국 CIA와 이스라엘이 자신을 노리고 중동 내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스라엘에 무언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스라엘에서 아라비아 해로 나가기 위한 주요 요충지인 티란해협을 봉쇄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이집트 병력을 시나이 반도에 배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물류 요충지 티란해협의 위치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고, 무력시위를 통한 강력한 압박으로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고,  당시 소련이 알려준 잘못된 이집트의 이스라엘 침공 첩보로 인해, 이스라엘의 선공이 시작됩니다. 


전쟁 이름인 "6일 전쟁"에서 나오듯, 6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전쟁이나 사실상 개전 3시간 만에 결정 난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450개의 항공기 중 300대를 상실한 것을 포함 공군력의 80%를 잃게 됩니다.  이후 요르단과 시리아를 공격해서 이스라엘은 자국영토의 3배에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의 레이더망은 동쪽 이스라엘 쪽을 향하고 있어, 이스라엘은 아래 그림과 같이 지중해를 우회하여 이집트의 서쪽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수면 30m로 교신 없이 장거리를 1) 초저공비행을 하면서 소련 해군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게 공습을 했고,  공습시간이 6월 5일 아침 8시50분 2)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3)아메르 공군원수겸 국방부장관겸 부통령이 시리아 방문을 마치고 공군기로 귀국하는 중이라, 방공망으로 사격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이집트 군은 제대로 교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3차 중동전쟁시 이스라엘 공군의 이집트 공격루트

지난번에 잠시 설명드린 "에어리어88" 애니메이션중,  반군이 정부군 비행장을 급습하는 장면에서 "6일전쟁"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여 갈무리를 해봤습니다.  



실제 "에어리어 88"중에서 외인부대 지휘관으로 나오는 샤기 바스탈이 타는 삼각날개 전투기가,  이스라엘군이 프랑스의 미라쥬전투기를 들여와서 무단복제, 개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크필 전투기입니다.  프랑스의 지지부진했던 전투기 사업이, 중동 6일전투에서 승전으로 인해 그 이후 빛을 봤다고 합니다.  

6일 전쟁에 참전한 이스라엘 크필 전투기


에어리어88 중 외인부태 지휘관의 삼각 전투기 (크필)
외인부대 지휘관 샤키바스탈


6일전쟁 내내,  이집트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상황과는 정 반대로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승전보를 보냈고,  이를 진짜로 해석한 요르단과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다 초장에 박살이 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가짜 방송을 인지하면서도 반박하지 않고 휴전 전에 최대한 많은 영토를 외부 방해 없이 획득하게 됩니다. 


결국 나세르는 유엔 안보리의 정전 안을 받아들이면서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미 절망적인 전항에 자살을 고려하고 있었던 나세르는, 아메르 부통령의 하야 및 쿠데타 압박으로 6월 9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집트 국민들이 나세르에게 권좌에 남을 것을 울부짖으며 호소하는 예상밖의 사태가 발생했고, 3주가 넘게 지속된  국민들의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대통령 직에 복귀하게 되었고, 그 대신 아메르 부통령이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세르는 1970년 9월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고,  후임 대통령으로 나세르와 왕립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절친이었던 사다트가 취임하게 됩니다. 

왕립 사관학교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사다트(좌측)과 나세르(우측) 


4) 나세르주의와 아랍연맹국가들의 탄생


나세르는 무능하고 부패했던 기존 왕들과는 달리, 대중의 전면에 서면서 뛰어난 연설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는데, 기존의 무식하고 거친 아랍국가 지도자들과는 달리 현대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울러 문학적 감수성도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후에 많은 정치적, 외교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국민들을 감동시키는 명연설로 극복하여 왔습니다.  


실직자의 고민을 듣는 나세르 대통령 (좌측), 문학적 감수성이 높았던 나세르 (우측)


나세르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여러 번 남겼는데, 1956년 7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만쉬야 광장에서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의 진정한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는데, 이를 듣는 아랍인들의 피가 끓었을 것 같습니다. 


"1854년 11월 7일, 르셉스가 이집트에 와서 사이드 왕을 면담하고는 자신이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운하가 사이드 왕은 물론이고 이집트 전체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리고 르셉스는 운하의 건설권을 따냈으며, 1856년에는 운하 건설회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이집트는 44%의 주식을 보유하는 대신 이 운하 회사에 몇 가지 의무 사항을 이행해야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공사기 간 중 우리 이집트 노동자는 무려 12만 명이나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운하가 이집트에 이득을 준 것이 무엇입니까?  이집트에 봉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집트가 운하에 예속되었습니다. 


1866년 2월 22일의 협정서 제16조는 "수에즈 국제운하 회사는 이집트의 것이므로 이집트의 법과 관습에 따른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까지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나라로 자신을 간주하고 있었던 겁니다. 


                                                  - 중 략 - 


우리가 굶어 죽는 동안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세했던 그 제국주의 회사가 우리에게서 강탈해 간 모든 것을 우리는 되찾을 겁니다.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수에즈 운하회사를 국유화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집트의 이름으로 공화국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회사가 이집트 기업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  

            [1956년 7월 26일 알렉산드리아 만쉬야 광중에서의 나세르 연설문 인용]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나세르 대통령은 아랍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아랍권의 통일국가 수립을 구상하게 됩니다.  먼저 시리아의 바트당이 이집트와 단일국가를 수립하자고 제안을 해옵니다. 당시 시리아는 정당 간의 내전으로, 범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이집트와 연합 공화국 수립을 희망하였습니다. 


1) 1958년 2월 22일 나세르 대통령이 시리아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과 함께 단일 국가 수립에 합의하면서, 아랍연합공화국이 수립되게 됩니다. (United Arab Republic, UAR 1958~1971)  그러나 이집트가 아랍연합공화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것에 불만을 일으킨 시리아 군부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리아는 아랍 연합공화국에서 탈퇴하게 됩니다.  

(정식으로는 1971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이 국호를 변경하면서 소멸됨)   


아랍연합공화국 (UAR, United Arab Republics)의 국기, 문장 및 위치


2) 아랍 공화국연방 (Federation of Arab Republics, FAR 1972~1977) 은 리비아의 지도자였던 알 카다피가 나세르의 범아랍주의 국가를 표방하여,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세 나라를 합병하여 성립하려고 했던 연방입니다.  1972년 성립되어 1977년 7월을 기해 해제되었습니다.  

아랍공화국연방 (FAR, Federation of Arab Republics) 국기, 문장 및 위치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범 아랍 연방공화국 수립의 시도가 있었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나세르 대통령의 범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나세르주의에 대한 당시 현지의 뜨거운 열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중동 4차전쟁 (1973년 10월 6일 ~10월 25일, "욤키푸르 전쟁")과 아랍민족주의의 쇠퇴 


나세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사다트는 2인자 시절의 온화한 이미지를 벗어나, 빠른 시간 내에 정적을 숙청하고, 군정 장악하는 동시에, 반공주의자로서 소련 군사 고문단과 민간 전문가 집단등을 소련으로 송환시켰습니다.  그는 서구적 합리주의 신봉자였고, 정교분리 및 세속주의자인 동시에, 반공주의자 였습니다.  


그는 3차 중동전쟁에서의 이스라엘한테 패배한 것에 대한 복수를 차근차근 준비해 갔습니다.  그는 이집트 군체계를 개혁했고 (기존에는 유력 집안 자제들이 장교임관 → 대졸이상 고학력자 위주 선발),  이스라엘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을 새로 수립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기갑 군에 정면승부보다는 포병을 활용하는 연계전략을 썼고, 이스라엘  공군에는 방공포와 신형 지대공 미사일을 활용해 저공, 고공비행 모두에 대응할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욤키푸르는 이스라엘의 대규모 휴일입니다.  3차 중동전쟁과 유사하게,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휴무기간 많은 군인이 휴가를 떠난 틈을 이용하여 대규모 기습공격을 가합니다.   이를 "욤키푸르 전쟁"이라 합니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전차들은 매복한 이집트 포병의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괴멸당하고,  출격한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이집트의 지대공 미사일과 방공포에 의해 하루에만 공군력의 10%를 잃게 되면서 아랍군이 기선을 제압하게 됩니다. 

동시에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에 협력적인 국가에 석유수출을 금하는 바람에 그 유명한 오일쇼크가 발생하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이스라엘은 핵 사용을 검토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에 핵무기 배치를 추진하고, 이스라엘이 핵을 사용할 경우 미국이 지원을 안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 여사는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결국 미국에서 이스라엘 지원으로 정책을 변경하고,  팬텀기 등 주력 전투기등을 지원하면서 정전 협상으로 가게 됩니다.   비록 이집트가 승리하지는 못했으나,   4차전쟁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군사력을 인정하게 되고,  적대관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 사다트는 그때부터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친미, 친서방의 길로 이집트를 이끌고 갑니다.   


※ 나세르와 사다트간의 차이는, 

나세르는 범아랍민족국가를 지향했고, 그 일부로서 이집트가 있다고 생각한 반면,

사다트는 이집트 그 자체가 중요했고, 별볼일 없는 아랍동맹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전쟁기간 동안 사우디, 리비아, 이라크등은 모두 이집트에 성화였지만, 막상 전쟁에는 소극적으로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다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까지 추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아랍국가의 맹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79년 평화협정을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를 "전쟁의 시기" 였다면 후반부는 평화 즉 "긴장 속의 평화 (Cold Peace)" 시기라고  부릅니다.  

 - 전반부는 나세르에 의한 3차에 걸친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시기였습니다. 

 - 후반부에서 사다트는 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으나, 이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의 길을 열게 됩니다 1977년 11월 사다트는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하여 의회 평화 연설까지 하게 됩니다.     

    1979년 카터 미 대통령이 중재한 캠프 데이비스 협정에서 역사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이 이루어집니다. 13일간 진행된 이 협정에서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의 연 20억 불의 원조와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게 됩니다. 

1979년 3월26일 캠프데이비드 협정 : 사다트(좌측) 지미카터(중앙) 이스라엘 메네헴 베긴총리 (우측)



 그러나 이집트를 형님의 국가로 여기던 아랍국들은,  사다트가 이 협의에서 고통받는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위한 대책을 기대했으나,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아울러 이집트 만의 이익을 챙겨 오자, 그를 아랍의 배신자로 취급하게 됩니다.   이에 아랍국가들은 이집트를 아랍연맹에서 제명시키게 됩니다. (1979)      


사다트는 본 협정으로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서방세계 인기 인사가 되지만, 아랍진영 및 소련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급기야 소련의 사주를 받은 군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되게 됩니다. 


1981 이집트 라마단전쟁 승전기념 행사장 (사다트 암살)


이후 1989년 이집트가 아랍동맹에 다시 복귀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아랍국가들을 주도하던 맹주의 위치는 아닙니다.  오히려 3차 중동전쟁 시, 이스라엘에게 지면서도 이집트 뿐 아니라 아랍국가들에 까지 거짓으로 승전 방송을 했던 점과,  4차 중동전쟁 이후 사다트에 의한 친 이스라엘 및 서방 정책으로 인해 기존의 형님 국가에서 배신자 및 사기꾼의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이번 글에서는 이집트가 추진했던 세속주의 및 범 아랍 민족주의에 대해 튀르키예와 비교하며 정리를 했습니다.   나세르와 사다트의 치적을 중동전쟁과 엮다 보니 많이 길어졌습니다.  둘은 절친이었지만, 정치/외교적 성향 차이가 너무 컸고, 이로 인한 고통은 결국 온전히 이집트 국민들의 것이 된 것 같습니다.    


지난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왜 아랍국가들이 이집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냉담한지에 대한 설명은 전부는 아닐지라도, 중요한 원인은 설명드린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새삼 위정자들의 외교적인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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