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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방아저씨 Feb 27. 2023

(사우디) MBS의 왕권 승계와 개혁조치

-  사우디 근대 역사와 현재 (3/3) 

지난 글에서 중동의 수니파 이슬람 맹주국가인 사우디 역사와 국가 건설까지 알아봤습니다.  

압둘아지즈 사우디 초대 국왕을 보면 고려의 태조 왕건이 떠오르게 됩니다. 태조 왕건은 부인을 29명을 두었습니다. 대부분 호족들과 연합을 위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오늘 얘기할 사우디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도 같은 이유로 최소 22명 이상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그 역시 21년간 재위를 하고 나서 (1932~1953) 태조 왕건처럼 후계 문제로 머리가 아팠을 겁니다.  


오늘은 사우디의 왕위계승 이야기와, 무함마드 빈 살만(MBS)의 "왕자의 난" 그리고 그가 추진 중인 개혁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과거 역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일이다 보니 추후에 fact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사우디를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라는 기대에 이야기를 아래의 순서로 풀어보겠습니다. 


1.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 이후 왕권 승계와 문제점  

2. 무함마드 빈 살만 (MBS)의 왕자의 난   

3. MBS의 사우디 개혁 정책 



1.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 이후 왕권 승계와 문제점  


초대 국왕이 1932년도 사우디를 건국하고 난 뒤, 때맞추어 38년도 원유가 발견되면서 명실공히 사우디는 중동 내 대국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원유는 이란 (1908) → 이라크 (1927) → 바레인 (1932) → 사우디 (1938) 순서로 중동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이 사우디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전에 원유가 발견된 이란, 이라크가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휩쓸렸을 시기에 사우디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주었기 때문입니다.  


1938년 미국 정유회사에 의해 사우디에서 원유가 발견되고,  사우디는 영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전격적인 계약을 맺음으로써 현재까지의 사우디와 미국 간의 관계가 시작되게 됩니다.  

중동 내 원유 발견 연도


미국에 원유 판매 및 파트너가 되면서 압둘아지즈 국왕은 사우디 국가 기틀을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왕권 후반부 왕권 승계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22명 이상의 부인에게서 아들만 44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는 부자 승계 대신 형제 승계를 택하게 됩니다.  장자인 사우드 왕에게 왕위를 주고 그 이후부터는 순서대로 형제들한테 왕위를 준다면,  형제들 간의 왕권 다툼은 줄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가계도 (조선일보 디자인편집실)

이렇게 압둘아지즈 초대 국왕 사후, 장자였던 2대 사우드 왕부 터 형제 승계가 지금 7대 살만 국왕까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형제 승계가 큰 이슈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기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 신임 국왕의 고령화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형제들도 나이를 먹게 되었고, 6대 압둘라 왕부터는 왕위를 80대 이후에 승계하고 됩니다

   - 신임 국왕의 승계 연령 : 2 대 51세 / 3 대 58세 / 4 대 62세 / 5 대 61세 /  6 대 81세 / 7 대 80세 


현재 살만 국왕은 2015년 80세에 왕위에 오른 뒤, 현재 90세에 가까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에 6대 왕 압둘라 국왕은 왕위 계승을 위한 충성위원회 (Allegiance Council)을 만들어서 44명의 형제들이 차기 왕의 선출을 협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더 이상 형제 상속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사우디는 젊은 층의 인구가 많은데, 이들은 나이들은 신임 국왕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살만 국왕은  왕위에 오르자, 나이 많은 동생인 무크린 왕세제를 실각시키고, 대신 형인 나예프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나예프를 왕세자에,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MBS)을 2대 왕세자에 지명합니다. (직접 자신의 아들을 1대 왕세자로 지명하기는 눈치가 보였을 겁니다.) 

그러다 2017년 5월 무함마드 빈나예프 왕세자를 가택연금 시키고,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MBS)을 전격적으로 왕세자로 지명합니다.  당시 무함마드 빈 살만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주도적이었습니다.  200명이 넘는 왕자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왕세자 지명 과정이 충성위원회에서 강압 적으로 진행됐다는 불만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이 왕세자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 힘 있는 외척세력의 형성 (수다이리 세븐 - 7형제) 


44명의 형제가 왕위를 순서대로 승계받는 상황에서는, 같은 모친의 왕이나 왕세제가 많을수록 권력이 모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압둘아지즈 선왕의 8대, 10대 부인인 수다이리 왕비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1913년 압둘아지즈와 결혼했다가 (8대 왕비) 이혼한 뒤, 왕의 이복형제와 결혼했다가 그녀를 잊지 못한 압둘아지즈에 의해 다시 이혼/결혼하여 1920년 다시 왕비가 됩니다. (10대 왕비)  왕이 죽기 전까지 혼인관계를 유지했을 정도로 그녀를 총애했고, 그녀는 일곱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이 딸을 낳았습니다.     


흣 사 빈트 아흐메드 알 수다이리 (1900-1969) 왕비 (좌), 수다이리 7형제 (우)


그녀는 사우드 가문의 근원지이자 당시 실세였던 네즈드 지역 유지 가문 출신으로, 그 가문이 현재도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일곱 명의 아들들을 "수다이리 세븐 or 칠 형제"라고 부릅니다.  

7명의 아들 중에는 현 살만 국왕을 포함한 두 명의 국왕, 그리고 두 명의 왕세제 등 사우디의 실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왕의 재임 기간이 초대 왕을 제외하면 10년 미만인데, 5대 파트 국왕만 23년입니다.

파드 국왕은 수다이리 7형제 중 첫 국왕으로, 23년간의 장기 집권 중에 수다이리 가문의 세력을 제대로 구축했습니다.    


      ※ 왕위 재임 기간 :  2 대 11년, 3 대 9년, 4 대 7년, 5대 파드 국왕 23년, 6 대 9년 


이후 6대 압둘라 국왕은, 외척세력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수다이리 형제인 살만이 아닌 무크린을 왕세자로 지명을 했고,  충성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충성위원회는 왕을 선출하는 기능을 가졌지만, 사실상 44명의 형제들이 의견을 내므로 외척세력을 견제하는 영향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수다이리 가문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고, 결국 7대 국왕에 왕세제인 무크린이 실각되고  살만이 되게 됩니다. (수다이리의 여섯째 아들).  한 술 더 떠서 살만국왕의 아들, 즉 수다이리의 손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 왕세자로 지명됩니다.   뒤에 설명드릴 MBS의 왕세자 자리 구축 및 개혁 활동은 할머니 수다이리 가문의 Back up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2. 무함마드 빈 살만 (MBS)의 왕자의 난   


현 살만 국왕의 지명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MBS)는 왕세자가 되었습니다. (2017. 5월) 

그러나 경쟁관계에 있는 왕자들이 계속해서 불만을 표출하게 됩니다.  MBS는 왕세자 지명이 충성위원회의 적법적인 절차에 의해 (31명 찬성 / 34명 출석) 되었다고 하나, 왕자들은 여기에 무력과 강압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017. 11월 MBS는 "부패 척결 운동"을 전개합니다. 이는 흡사 세조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연상하게 합니다.

주요 왕족들 200여 명을 리야드 리치칼튼 호텔로 불렀고, 입장하는 족족 근위대가 방에 감금을 했습니다.  반발하는 왕자들에게는 구타 및 고문이 행해졌다고 합니다.   부정 축재한 자금을 국가에 애국 헌납금 형식으로 납부, MBS에 충성 맹세를 받고서야 풀려났다고 합니다.  (이중 아랍의 워렌 버핏이라 불리는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는 60억 불 황금 전용기 및 벌금으로 7조 이상 헌납을 약속하고 풀려났다고 합니다.)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 (A380 개인 전용기 소유) - 아랍의 워런버핏 별명 

이때 모금된 애국 헌 납금이 1,200억 달러 (약 120조) 였다고 합니다. 당시 유가 하락 시기에 이 기금은 MBS의 정책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우디 리야드 리치칼튼 호텔 - 왕자들을 감금한 6성급 호텔
호화스런 왕자들의 생활(좌), 감금된 왕자들 (우)


강압과 무력으로, 그리고 7형제의 영향력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입지는 어느 정도 구축이 되고 있습니다.  90세에 가까워진 살만 국왕은 조만간 양위가 예상되어,  지금까지의 형제 상속에서 첫 성공적인 부자 상속이 예상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3. MB (무함마드 빈살만)의 사우디 개혁 정책 


17년 "왕자의 난"으로 왕세자 자리를 굳힌 무함마드 빈 살만은,  이제 자신이 능력 있는 왕세자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무력으로 왕자들을 제압하고 올라간 자리가 아닌,  자신이 능력자라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이번에는 그가 추진 중인 개혁 정책과 Risk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MBS의 개혁을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Vision 2030 프로젝트 등 사우디 탈 원유 및 산업 다각화

     와하비즘 강경 이슬람 정책 완화

    이란에 대한 강경 노선      


 1) Vision 2030 프로젝트 등 사우디 탈 원유 및 산업 다각화


2016년 2대 왕세자로 지명 당시 Vision2030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기존의 원유 수출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는 산업다각화의 밑그림을 공개했고, 2017년 스마트 시디인 "네옴 시티"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2016년 기준 사우디 연령별 인구분포입니다.  30세 이하 비중이 70%를 점유하기 때문에, 젊은 세대를 위한 Vision이 정권 유지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vision2030은 젊은 층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뿐만 아니라,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우디 연령별 인구분포 (2016, www.indexmundi.com)


이에 대해서는 지난 사우디 포스팅에 대략적인 설명을 했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westnn777/4


2) 와하비즘 강경 이슬람 정책 완화


1979년은 중동지역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도 있었습니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중 하나가 사우디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 무력 점거 사건이었습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영향을 받은 와하비즘 추종자인 알 오타비가 이끄는 500명의 무장세력이 1979년 11월 20일 5만 명의 순례객이 있던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를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오일머니가 유입된 이후 변모한 사우디 사회를 타락했다고 비난했으며, 이를 방조한 사우디 왕정을 격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들 중 다수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용병 이크완 출신입니다.)  그들은 하기의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1. 미국으로 석유 수출을 중단할 것 

   2. 사우디 내 모든 외국인을 추방할 것 

   3. 텔레비전을 사우디에서 추방할 것  


당시 사우디는 이들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고, 굴욕적 이게도 프랑스 특공대를 불러 진압작전을 추진했고, 수백 명의 사망자를 낸 뒤에야 그랜드 모스크는 사우디 정부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메카 성지에 이교도를 불러들여서 무슬림을 진압한 사례입니다.)

메카의 그랜드모스크 무력점거사건 (1979.11.20 퍼블릭도메인) 

이 사건 이후,  사우디는 그동안 타락한 이슬람에 대한 각성을 했고,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이슬람 규율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의 복장 및 행동에 많은 제약이 행해졌고,  이를  단속하는 종교경찰의 권한이 강화되어 왔습니다.   

사우디 여성의 복장 변화 (1970년대 좌측 vs 그랜드모스크 점령이후 우측)


빈 살만은 1979년 그랜드 모스크 점령 사태 이후 행해진 비이성적인 강경 이슬람화 정책을 완화하고 있습니다. 

여성 운전자의 운전이 허용되었고,  금지되었던 사우디 내 극장을 허용하여 신규 극장들이 급속도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축구장에 여성 관람 허용,  콘서트 개최 허용 및 여성 관람이 허용되어 최근 BTS 및 블랙핑크 공연이 사우디에서 벌어졌습니다.  (블랙핑크 공연은 현지 매체에서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아 아직까지 한계는 있다는 의견입니다.) 

아울러 홍해 영화제 개최,  엔터테인먼트 시티 조성을 통한 사우디 내 영화 촬영 독려 등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호날두를 사우디 팀으로 영입하면서,  2030년 사우디 월드컵 홍보대사를 검토할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및 스포츠에 대한 투자 및 관심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를 통해, MBS는 여성 및 청년층의 지지를 늘여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3) 이란에 대한 강경 노선    

 

 아울러 그는 이란에 대한 강경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MBS가 직접 진행한 일들입니다. 

16년 1월 사우디에 거주 중인 3명의 지도자를 포함한 시아파 테러 혐의자 47명을 집단 처형했습니다.  

사우디 동부 지역에는 시아파 거주민들이 약 3백만 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총인구의 10% 수준).  빈 살만은 이들을 테러 혐의가 있다고 하여 집단 처형을 했고,  사우디 내 집단 처형은 79년이래 처음으로 매우 이래 적인 조치였습니다.   이란 내에서는 사우디 대사관을 공격하였고, 두 나라는 그 이후 단교에 들어갑니다. 

사우디의 시아파 인사 집단처형에 반발한 이란 군중의 사우디 대사관 공격보도 

MBS는 또한 시아파 후티 반군에 의해 수세에 몰리던 ▶예멘 정부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이란과 사우디는 대리전의 형식으로 정부군과 반군을 지원하며 적대감이 더 커지게 됩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하기 글 중간에 예멘 내전을 참고하세요. 

https://brunch.co.kr/@westnn777/1


이란과 적대 노선을 확대하기 위해,  MBS는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국가로 인정합니다.  두 나라는 팔레스타인 이슈로 인해 적대 관계에 있었으나, 이란이라는 공동의 큰 적 앞에서는 함께 협력관계가 됩니다.   사우디는 네온 스마트 시티 건설에, 이스라엘의 기술력을 활용하기로 협의했고, 공동 투자하기로 합니다.   사우디는 자국뿐만 아니라 UAE, 바레인 등 인근 국가에 이스라엘과의 국교 수립을 독려하였으며,  이로 인해 2020년 아브라함 협정이 이스라엘과 UAE, 바레인 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이란 국가에 대해서도, 기존에는 인정을 안 했으나 지금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국가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1979년 이전 사우디와 이란은 같은 친미국가로서 나쁘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을 몰아내고 공화정이 된 이란은 사우디 왕정에게는 큰 Risk였습니다.   당장 같은 해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태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걸프전 당시 한시적으로 국교를 재개했으나,  현재는 위에 설명드린 것처럼 단교 상황입니다.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을 계속해서 반대하는 두 국가가 이스라엘과 사우디로 보시면 됩니다.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사우디 왕정의 역사와,  MBS의 왕세자 굿 치기 과정 및 개혁 정책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현재까지 MBS의 왕세자 자리 강화 및 개혁 정책은 자국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국 내 다른 왕자들의 잠재적인 반발,  와하비즘 이슬람 주의자들의 개방적 세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아랍 세계 내에서 친 이스라엘 정책,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소극적 대처는 많은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언급을 안 했지만,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인 자말 카슈 꾸지 기자 살해 사건에 빈 살만 왕세자의 연루설은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빈 살만을 Bypass 하고 고령의 아버지 살만 국왕과만 얘기하겠다는 것도 이 문제가 주된 이유입니다.  

아울러 메카와 메디나 성지의 수호자로서,  미군과 이스라엘을 사우디 영토로 불러들인다는 데 대한 비난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진행되고 있으나, 젊은 왕자가 그간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란의 경우 기존 사우디 체제를 계속 무시해 오다가,  MBS의 개혁 정책에 많은 자극을 받고 경계를 강화하는 분위기입니다.  부디 향후 좋은 결과가 있고,  한국과의 협력 증대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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