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그 EP 15
요즘 여행 트렌드는 뭐니 뭐니 해도 '한 달 살기'같다. 기간의 특성상 어디 메여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은 쉽게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퇴사하고 한 달 살기를 떠나는 분들이 많다. 나 역시 퇴사 후에는 꼭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었다. 길어야 며칠 머물 수 있는 여행을 벗어나 여행지가 우리 동네가 되는 그런 여행 말이다. (물론 진짜 우리 동네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살아보고 싶은 곳은 유럽의 변방 국가이고, 그 외에는 태국처럼 인프라가 괜찮은 동남아도 좋을 것 같다. 거기다 지금 배우는 중국어를 써먹어 볼 수 있는 중국도 꼭 한 번은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나는 퇴직금도 있겠다. 뒤만 걱정하지 않는다면, 웬만큼 물가가 높은 곳에서도 몇 달 살기가 가능은 하다. 배우자도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언제든 오빠 혼자 다녀오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지 않다.
만약 혼자 한 달 살기를 떠난다면, 내 일상은 이럴 거다. 아침에 동네 산책을 나가 단골로 점찍어둔 곳에서 커피를 한 잔 할 것이다. 그리고 점심, 저녁거리를 사 오겠지. 집에 돌아와서는 방송대 수업을 듣고, 중국어 발음을 녹음해 배우자에게 전송. 아마 그녀는 중국인 같다는 칭찬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생활이 길어지면, 집에는 한국 라면이 쌓인다. 산책보다는 유튜브를 볼 것이고, 내린 커피보다는 캔으로 된 음료를 더 자주 마시게 될 것이다. 나는 나를 매우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상이 늘어지면 어떻게 사는지는 알고 있다. 아마 '며칠 남았지?' 하며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단순히 내 삶이 루즈해질 것만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혼자만의 시간이 즐겁지가 않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의 재미가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는 재미의 상당 부분이 배우자와의 농담 따먹기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녀가 퇴근한 후 동네 한 바퀴를 돌 수도 없고, 오늘은 먹지 말자고 해놓고 맥주 한 통을 나눠 마실 수도 없는 한 달이라니. 나에게 그런 한 달은 너무 길다.
거기다 우리 배우자만 이 집에 남겨놓기는 더더욱 싫다.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로맨틱한 이유는 아니다. 지랄 맞은 우리 집 화장실은 습기 좀 찼다 싶으면 물때가 생긴다. 그리고 로봇 청소기에 낀 머리카락은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줘야 하고, 휴지통 크기에 맞는 비닐을 골라 씌우고 그것을 두 개 모아 종량제 봉투 버려야 하는데... 배우자 혼자 이것들을 완벽히 다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얼마 전 우리 아파트 단지의 음식물 쓰레기 통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 잘못된 의심은 아닐 테다. 사실 집 관리를 좀 소홀히 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그녀가 한 번도 안 해본 것들을 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배우자는 비교적 이직이 자유로운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런데 현 직장에 대한 만족감이 커서 당장은 한 달 살기를 계획할 수가 없다. 예전엔 해외여행은 늘 혼자 다녔었다. 그 나름의 운치도 경험했고. 그런데 타지에서 나 혼자 한 달이나 살면 얼마나 심심할지 걱정부터 되는 걸 보니 이제 별 의미가 없다.
한 달 살기는 좀 이따가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