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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Nov 23. 2023

나는 슬로우 스타터

이사한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아파트 피트니스 센터에 갔다. 참 오래 걸렸다. 피트니스 센터에 가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데 3년이 흘렀다. 큰 마음먹고 센터에 갔을 땐 문이 잠겨 있었다. 알고 보니 돈을 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관리소에다 피트니스 센터 이용을 신청하기까지도 몇 달이 걸렸다. 그렇게 받은 비밀번호조차 까먹어서 한 달을 넘게 출입을 못했다. 11월이 되자 센터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는 관리소의 문자가 왔다. 그제야 내가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밀번호도 알았으니 시간 되면 가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러고도 11월 중순이 지나서 처음 가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고구마를 한입 씹어 먹는 듯한 답답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원래 슬로우 스타터다. 이제 한번 가기 '시작'했으니 당분간은 꾸준히 다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 인생도 자세히 보면 남들보다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과학고에서는 2년 만에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갈 수 있다. 카이스트 동기 대부분은 그런 조기졸업생이었다. 하지만 난 고등학교 3년을 다 채우고 갔다. 2학년 때까지는 카이스트에 갈 생각이 없었다가 뒤늦게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교 동기들은 대부분 나보다 1살이 어렸고, 난 형, 오빠 소리를 들으며 학교를 다녔다.


대학교도 4년이 아니라 6년 만에 졸업했다. 군대를 다녀온 것도 아니었다. 1년은 어학연수란 명목으로 휴학하고 외국 친척집에 있었고, 나머지 1년은 재수강을 해서 학점을 올렸다. 결국 나랑 같이 졸업한 동생들은 대부분 나보다 3살이 어렸다.


그러고 간 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병역특례로 중소기업에서 3년간 근무했다. 병역 의무까지 마치고 사회의 일원이 될 준비를 마쳤을 때 나는 이미 서른이 넘었다. 그때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으니, 그땐 다른 사람들보다 몇 년 늦었는지 셀 자신이 없었다. 고시촌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난 적도 거의 없을 정도로 늦은 때였다.


합격을 하고도 그랬다. 공부한 4년이 긴 기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짧은 기간도 아니다. 연수원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2~3년 만에 합격했다. 안 그래도 늦은 인생, 합격하고도 살짝 뒤처진 기분이었다.


곧 마흔이 되어서 결혼을 했다. 남들은 결혼이 늦은 것 아니냐 했지만, 난 원래부터 뭐든지 늦었고, 결혼은 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행운이다. 아직 아기는 없지만, 혹여나 낳게 된다면 걔는 정말 나이 많은 아빠를 보고 그럴 것이다. 우리 아빠는 친구 아빠보다 왜 이렇게 나이 들어 보이냐고.




중고등학교, 대학교 때만 해도 남들이 나에게 그랬다. 너는 똑똑하니깐 남들보다 빠르게 앞서 나갈 거라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1년, 2년씩 늦음을 적립해 왔다.


그래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난 느리더라도 최소한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다만, 이젠 한번 잘못된 길로 가면 되돌아올 시간도 없는 만큼,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고 올바르게 가야겠다고. 이걸 마흔이 넘어서 깨닫게 되었다. 참 늦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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