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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May 19. 2024

어쩌다 등산부부

등산을 싫어하던 내가 등산을 시작했다. 등산을 얼마냐 싫어했냐면, 전에 회사에서 단체로 등산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난 비서관임에도 상사가 가는 등산을 따라가지 않았다. 심지어 상사가 나에게 등산 안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안 갈 거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등산에 트라우마가 있다며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중학교 때 단체로 남덕유산을 간 적이 있었다. 선두에 섰던 난 산 정상 가까이서 큰 바위를 만났다. 우리 일행은 길을 몰라서 바위 옆에 매달려 돌았다. 바위 바로 밑은 낭떠러지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지나간 후 하루종일 스트레스를 받았다. 되돌아갈 때도 다시 그런 방식으로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대로 된 길은 그 바위를 올라가 넘어가는 것이었고, 그 길은 매우 안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왔다고 했다. 어쨌든 난 등산 내내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그 후로 산을 무서워했고, 어떤 모임이든지 등산은 따라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건 둘째 치고, 상사는 진지하게 설명한 날 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래 네가 가기 싫다면 억지로 가라고 할 순 없겠다며 포기하셨다.




그랬던 내가 최근 회사에서 계룡산을 등반할 때는 가겠다고 자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선 아니었다. 회사에서 올해 사무관 모임(?)에 대표로 뽑히는 바람에 가야겠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게 이유가 되냐고 그랬지만, 나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뭐라 하든 간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거의 30년 만에 등산이었다. 등산화와 등산 스틱을 새로 사고, 등산 가방도 선배에게 빌렸다. 등산복이 없어서 아내가 요가할 때 입는 바지를 빌렸다.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계룡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동학사부터 남매탑, 삼불봉, 관음봉, 그리고 다시 동학사까지. 근 6시간 코스 동안 항상 선두 그룹에 있었다. 걱정한 만큼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등산에 트라우마가 있다며 사실상 처음 등산을 한다는 내가 그렇게 잘하는 걸 보고 어이없어하기도 하고, 등산에 재능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하기도 했다. 평소에 한 수영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내가 등산에 다녀온 것 때문인지, 아내도 등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나랑 똑같은 등산화를 사고선 함께 세종시 전월산을 올랐다. 무궁화 공원에서 시작해서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데 총 2시간이 걸렸다. 평소 등산을 안 해본 아내가 생각보다 잘 걸어서 나도 깜짝 놀랐다.


아내가 등산에 재미를 붙였다. 전월산으로 성이 안 찼는지 이젠 계룡산에 가자고 했다. 아내는 뭘 하면 제대로 하는 성격인 걸 아는데, 나는 계룡산은 생각보다 힘든 곳이라고 말렸다. 그렇지만 아내의 열정은 대단했다. 결국 오늘, 함께 계룡산을 올랐다. 전에 회사에서 갔던 코스 그대로 동학사, 남매탑, 삼불봉, 관음봉, 동학사까지 총 6시간을 걸었다. 아내는 중간에 숨을 고른다며 쉬자고 한 적은 있어도, 힘들어 포기하겠다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관음봉에서 동학사까지 2시간을 내려오는 데 발이 많이 불편했지만 억지로 참고 끝까지 걷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 인생에 힘든 일이 있어도 아내는 잘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 같아서 좋았다.


다음 주에 소백산도 가기로 했다. 거기다 아내는 자기 회사 등산 동호회에 가입할 거라고 한다. 또 앞으로 매주 등산을 다니자고까지 한다. 주말에 집에서 책 보며 쉬는 게 더 좋은 나로서는 아내의 열정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도 아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니 함께 해야겠다. 그렇게 우리는 어쩌다 등산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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