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사무관 시절 기재부 파견 때 일이니 지금부터 한참 전이다. 기재부 과장님과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대화 중에 스마트 농업이 언급되었는데, 평소 관심 있던 주제라 열정적으로 내 의견을 말했다.
"지금 스마트 농업이라고 하면 온실에서 온도는 몇 도, 습도는 몇 퍼센트 이렇게 기계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것만으로는 스마트 농업이라 하기에 부족하다. 농업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작물의 생육 단계에 따라 딱 맞는 일조량, 비료, 온도, 습도 등이 자동으로 제공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렇게 최소한의 생산량이 보장되어야 스마트 농업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과장님도 내 말에 흥미가 있었는가 보다. 다른 땐 주로 듣기만 하시더니 이번엔 본인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다.
"자네가 중요한 점을 집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강했던 이유는 바로 조총 때문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의 기준에서는 조선의 활도 조총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다만, 일반 병사의 경우엔 활을 잘 쏘기까진 오랜 기간의 훈련과 경험이 필요했다. 조총은 병사가 더 짧은 기간의 훈련을 거치더라도 활 이상의 강한 화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더 유리했다. 스마트 농업도 마찬가지로, 초보자도 수십 년의 지식과 경험이 쌓인 농부 못지않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란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나만의 개똥철학이라 생각했던 걸 다른 부처 과장님께 좋은 아이디어라며 확인받은 사실에 기뻤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 외에도 과장님과 1년 동안 지내면서 특정 업계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 차원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법 등을 배웠다. 나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영감을 얻고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공무원이 되었을 땐 어떻게든 사회에 기여하는 일로 보람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어떻게 쓸까 고민하기보단, 관련 분야의 책도 읽고 인터넷도 뒤져보며 최신 기술도 한 번씩 써보고 민간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듣기도 하면서 내가 몰랐던 걸 깨닫고 이걸 정책에 반영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현장방문도 괜히 과장님이랑 같이 가면 형식적인 회의가 될까 봐 주로 나 혼자 다녔다)
우리나라 의료비를 분석할 땐 아산병원의 교수께 무턱대고 찾아가서 의견을 듣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 회의를 한 일이나, 복지부 몰래 원주에 건강보험연구원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가서 전문가들을 만나고 자료를 받아온 일을 떠올려 보면, 그땐 내가 공무원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교수든 연구원이든 전화로 물어보거나 직접 찾아가면 모두가 잘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관심 사항이 정책에 반영되길 무척 원했었다)
지금은 주로 공무원을 상대로 법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책상에서 떠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정작 남들은 관심 없는데 우리끼리만 중요한 일을 한다고 힘을 빼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땐 다른 부처에 파견을 나가서 시야를 좀 넓힐 필요가 있다. 아니면 10년 정도 일한 사람에겐 교수의 안식년처럼 1년 정도는 자기계발하고 성장하는 데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