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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운 Jul 04. 2024

카멜레온 블루

우리는 바다를 표현하면 푸른색으로 그리고, 노래하고, 글을 쓴다. 파랑은 단일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에 어쩌면 바다에게 어울리는 색일지도 모른다. 바다의 블루는 동경과 그리움과 사랑, 꿈과 희망, 우울과 사색 등 모든 감정의 색을 품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블루에서는 바다를 느낄 수 없었을까? 요즘의 나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연의 파랑에 빠져 있었다. 매일 비슷하게 돌아가는 삶, 더 나아지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내일, 어디서부턴가 정체되있는 것 같은 나. 재밌는 것을 봐도 재미있지 않았고, 슬퍼해야 할 때에도 슬퍼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여 감정을 상어에게 잡아먹혀 빼앗긴 듯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이 이 우울이라는 파랑에 계속 빠져들면서, 잠도 자지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충분한 잠과 여유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조용한 방에서 커져가는 심장박동 소리에 쫒기며 결국 몸살감기에 오랫동안 앓아왔다. 



몸이 아프니 더욱 구렁텅이에 빠져들기 쉬웠으며, 이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어 자연스레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하고, 잠만 잤다.


고요한 태풍의 눈에 있는 것 같은 나는 결국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감으로 발전하여 바닥까지 추락한 자존감으로 끊임없이 나를 추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더 심해졌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누군가에게도 이 안좋은 모습이 피해가 될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고심하던 끝에, 늦은 밤 팀장님께 길게 연차를 쓰고 싶다고 얘기를 하고, 약 7일간의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나는 도망쳤다. 도망쳐야만 했다.



온전히 도망치지는 못했다. 매일 연차 쓰고 조금씩은 일을 하면서 최대한 일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자 노력했다. 오랜만에 강릉으로 바다를 보러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기차를 탔다.



호우주의보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지만 괜찮았다. 덥지 않고 시원해서 좋았고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빗물은 해변가의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상상으로 넘겼다.


강릉은 적지 않게 갔다. 그래서 조금은 다른 바다를, 사람이 많지 않은 바다를 보고 싶어 강릉역에서 내리자마자 주문진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 세상이 파도소리로 가득한 주문진이 마음에 들었다. 계속 해변가의 길을 따라 한가득 짊어진 가방을 매고 걸으며 바다를 보았다. 옷을 벗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 물고기를 낚고 있는 어부들. 출항을 준비하는 사람들.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가게들. 파도 소리의 틈새에 사람들의 삶의 소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이어폰을 벗어던지고 파도와 바다의 소리에 집중하며 일렁이는 물결들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었다. 정체되어 있던 나와 다르게 분주하게 일렁이는 잔물결들과 있는 힘껏 암초에 부딪히는 파도의 모습들이 좋았다. 부럽기도 했다.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의 모습은 내 마음 어딘가를 떄리는 듯 했다. 



끊임없이 출렁이는 바다는 바람의 응원일까, 바닷속의 수많은 생명들의 에너지일까. 시원하게 부는 바닷바람에 위안을 느끼며 바닷속으로 조금씩 나에게로 향한 혐오감들을 던져보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까지 흘러가주길.



지금까지 수평선은 칼날처럼 하늘과 바다를 날카롭게 잘라 이어붙인 것처럼 반듯하게 보였다. 하지만 하염없이 바라본 그날의 수평선은 일렁이고, 흔들리고 있었다.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는 수평선의 일렁임은 나에게 또 다른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예전에는 수평선은 아득하고 반듯한 직선의 세계였기에, 나에게는 머나먼 꿈과 같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날의 수평선은 내게 함께 일렁이며 파도쳐야 한다고 말을 하는 듯 했다. 해변가의, 지금 여기의 작은 파동은 저 멀리 수평선까지 닿을 수 있다고, 그러니 나의 작은 언행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들렸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가 작은 파동을 일으켜보았다.



언젠가 나의 바람이 수평선에 닿아, 수평선을 넘어,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해가 저물 때까지 바다에 모든 것을 맡기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바다를 보러 갔다. 매시간마다 햇빛과 구름의 손짓에 따라 바다는 오색빛깔의 다양한 파란색을 보여주었다. 가장 해가 높이 떠 있는 시간엔 백야같은 하얀 바다가 펼쳐졌고, 노을이 지기 전 선선한 바람이 불 때는 그 어느것보다 청량한 파랑을 보여주었다. 노을이 오렌지빛으로 하늘을 물들일 때는 바다에도 오렌지 주스가 흘렀다. 새벽에 바라본 바다에는 짙은 주황빛 태양이 길다란 혀를 바다에 늘어뜨리며 떠있었다.



왜 나는 바다를 그릴 때 같은 파란색으로만 색칠해 왔을까.


왜 나에게 바다는 늘 파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나는 파랑색 바다만 동경하고 닮아가고 싶었을까.



나는 광활하고 깊은 바다를 동경하면서 단편적인 모습만을 사랑하고 닮아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색은 내가 되지 못한 또 다른 나의 모습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설레감을 주었다. 모든 바다가 똑같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있음에도, 우리는 같은 바다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늘 같은 바다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체되어 있지 않고, 더 다채로운 바다가 되기위해 매일 매순간 흘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삶으로 반복되더라도, 내가 끊임없이 흘러가고자 한다면 다른 하루를 보내며 다른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시간의 유한함을 인지하며 살아가야겠다. 매순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나의 삶은 카멜레온처럼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바다는 늘 파랗지 않다. 블루의 또 다른 이름은 무지개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유한하게 흐르고, 파도는 유한함이라는 운명에 강렬하게 부정하며 나아간다. 나 또한 흐르지 않으면 암초에 한없이 억압당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는다면 나를 가로막던 암초들을 깎아 내리고 뛰어넘으며 더 넓은 바다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계속 파도치고 흘러간다면 또 다른 빛깔의 바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며, 카멜레온 블루의 바다를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모든 소리를 차단한 채 파도의 소리를 그렸다. 앞으로 언제든 내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파도의 소리를 떠올리며 걸어가야겠다.



나만의 카멜레온 블루를 찾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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