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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pr 05. 2024

직업이라는 존재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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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 <걸작 또는 수평선의 신비>(1955)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표상이며, 현상이며, 나에게 보이는 누군가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의 양태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한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수식어는 굉장히 많다. 키가 크다, 뚱뚱하다, 눈이 크다, 공부를 잘한다, 손이 크다 등등. 그런데 이런 특징들은 하나의 인간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를 보여주기에는 한참 모자란 정보 같다. 그의 신장, 체중, 외모는 그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그의 외모 말고 다른 것을 추측하기엔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해석하게 해 주며, 그 지표가 되어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아마 직업과 자산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자산보다는 직업을 다뤄보려 한다.


직업과 양태

  직업이라는 것은 그 현존재(現存在 , Dasein)의 존재방식을 해석하기에 용이한 정보이다.  직업은 그의 사회적 지위, 연봉, 그의 특성 및 많은 것을 암시해 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존재방식을 영위하기 위해서 초중고 12년과 대학교 4년을 다니나 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존재방식을 영위하기 위해서 대학원을 가는 것일까? 공부와 성적이라는 것은 취업 전까지 그 존재를 대변해 주는 습관이자 지표이다. 우리는 흔히 더 나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학창 시절 공부를 하고, 더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서 학부시절 스펙을 쌓고, 학점을 관리한다. 그리고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서 대학원에 가서 학위를 받기도 하며, 유학을 가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을 끝낸 후, 자신의 존재방식 중의 일부인 직업을 위해서 우린 공부하고,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간다.


  왜 우린 학창시절에 높은 성적을 고수했는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했는가?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 그렇다면 왜 좋은 직업을 얻으려고 했는가? 돈을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렇다면 돈을 많기 벌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 좋은 직업을 얻고자 한다는 것인데, 좋은 직업을 얻으면 반드시 그것이 성취되는가? 그건 모른다. 그러나 그럴 확률이 높다는 담론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직업은 그의 양태 중 일부에 불과하다. 일주일은 7일이며, 하루는 24시간이다. 즉, 우리는 일주일을 168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린 주 52시간 일을 하며 직업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린 24시간 중에 3분의 1에 해당하는 그 부분적인 존재방식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쓴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24시간 중에 자는 시간 포함해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8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하루에 16시간을 생각하며, 노동하고, 실존을 영위한다. 그 16시간 중에서 아마 절반을 회사에서 보낼 것이며, 근무를 할 것이다. 즉, 직업은 나의 존재를 딱 절반만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표는 상수가 아닌 변수로서 작용한다.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우린 그것을 본질이라 부르며, 변하면 그것은 본질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의 외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의 영향을 받으며, 나의 친구, 가족, 주변인들도 영원한 동반자일순 없다. 직업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은 대기업에 다니던 회사원이 내일은 바리스타일 수 있으며, 5년 뒤에는 치킨집 사장님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직업이란 나의 본질을 정의하는 절대적 상수가 아니며, 나의 본질을 드러내는 유한성을 띈 양태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린 그 직업이 나를 규정한다고 착각하며, 자신을 규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취업을 준비한다.


  직업. 물론 중요하다. 우리는 직업을 통해서 인류애를 전파할 수도 있고, 남에게 해를 가할 수 있으며, 사회의 정의를 실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과 그의 고유한 윤리를 목격한 다른 사람들이 그 양태를 보고 그를 해석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직업이라는 것은 나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과 책임을 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직업에 목을 메나보다. 즉, 직업이란 사회에서의 역할을 의미한다. 사기꾼은 사회의 악으로서 인식될 것이며, 판검사는 사회의 정의로 인식될 것이며, 고소득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그를 나타내는 수많은 양태중에 극히 일부인 직업은 그의 본질을 규정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직업이라는 변수

  직업이라는 것은 사회라는 지평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두 발로 서있기 위해서 땅바닥이 필요하듯이. 그런데, 사회라는 것은 고정적인 불변의 체제가 아니다. 중세에는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정보혁명 이후에는 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또한 같은 시대를 살더라도,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다른 사회적 가치관이 형성될 것이다. 즉, 다른 구조속에서 그리고 변하는 구조속에서 우리는 직업을 상수가 아닌 변수로 여겨야 한다. 직업의 지위는 계속 오르락내리락한다. 중세는 종교의 영향을 받았기에 성직자의 지위가 높았으며, 기술의 영향을 받는 현재는 엔지니어들이 고소득을 취하며 높은 지위로 인정받는다.


  직업이라는 것은 그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이며, 동시에 암묵적으로 나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다. 직업으로 수준을 나누는 것은 그다지 윤리적이지 않은 것이지만, 서열을 매기는 영장류의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직업이 나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소득직이라고 해서 나의 본질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직업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루를 무엇을 하며 보내고,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고, 무슨 일을 해서 세금을 내는지 보여주는 나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앞에서 공부하는 이유와 좋은 대학을 가는 이유와 좋은 직장에 가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그 방법만이 행복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직업은 그 수단일 뿐이지, 행복의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만족감과 행복을 느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리는 그런 이유로 의사, 변호사, 대기업 임원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린 그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높은 봉급 그리고 인정욕구에 의해서 그런 직업을 선호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우리의 욕구는 본인의 욕구가 아니라 사회라는 구조가 만든 구조주의적 욕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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