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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May 30. 2024

예술은 종교의 이름인가?

Religion called Art

[1]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 <Vir Heroicus Sublimis>(1950)

  위의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존재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뻘건 게 기분 나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위에서 정열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심미적 판단 말고도, 누군가는 위의 것을 보고 고장 난 디스플레이의 한 장면과 같다고 인식론적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전자가 감성에 의한 판단이라면 후자는 이성에 의한 판단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판단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는데, 판단이란 대체 무엇인가? 검색을 해보니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이 정의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 혹은 이성을 통해서 이것은 무엇이다 혹은 이것은 무슨 상태라고 단언하는데, 이것이 판단이다. 나는 이 글에서 작품에 대한 판단을 다뤄보려고 한다. 판단이라는 단어를 서두에서 많이 사용해서 혹자는 내판단력 비판』(1790)을 인용하거나 그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글을 전개하겠구나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 않을 예정이다. 굳이 인용하자면 아마 칸트가 제3비판서에서 판단을 어떻게 내렸는지 정도? 일 것 같다.

[2]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보편적 예술

  프리드리히가 그린 [그림 2]는 예술에 조예가 없더라도 혹은 미술을 싫어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작품(혹은 그림)으로 인식될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우린 각기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이다. 암벽 위에서 고뇌하는 한 명의 지도자 혹은 절망에 빠져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하는 한 명의 현존재로 보일 수도 있으며, 시니컬하게 저 그림을 바라보면 "거 참 폼 잡고 멋진 척하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작품이라는 것은 아무리 창작자가 해석을 직접 해주더라도 그 그림의 심연 속에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프로이트 이후로 우리의 행동은 모두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님이 폭로되었는데, 어떻게 예술활동에 무의식의 기여가 없겠는가. 아무튼 그 작품이 어떤 세계를 품고, 어느 진리를 담고 있던지 간에, 우린 그 작품을 해석하고 판단하기 전에 어느 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물체가 예술작품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보편적인 원칙이 있으면 구체적인 사례들 중에 특정의 사례가 이 보편적인 원칙의 어디에 해당하는가(부합하는가)를 알아내야 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판단력이다(백종현, 206). 즉, 칸트의 이론에서는 보편적인 원리에 구체적인 사례를 포섭시키는 능력을 규정적 판단력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보고서 그것이 작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것이 작품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를 경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예술을 먼저 알아야 판단대상이 예술작품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예술의 사조마다 다를 거다. 하지만 위의 [그림 2]의 경우는 보편적으로 예술작품이라고 판단된다. [그림 2]의 경우는 판단의 문턱이 낮기 때문이다. 붓의 스트로크가 드러나며. 감각적인 것의 재현을 통해서 무엇을 그렸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 1]은 어떨까? 


현대 미술

  [그림 1]은 과연 모두가 작품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철학과에 입학해서 버크, 칸트, 리오타르의 미학을 배웠다면 뉴먼의 추상회화를 접했으므로, 좀 꺼림칙스럽더라도(?) 그것을 작품으로 판단할 것이다. 혹은 미술을 전공하거나, 그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뉴먼의 추상화를 작품으로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그럴까? 

  “현대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과거의 예술은 관습적 언어가 있었기에, 그 익숙한 코드에 따라 쉽게 해석이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에는 이렇다 할 해석의 코드가 없다. 이미 존재하는 코드(양식)에 따라 메시지(작품)를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가지고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작품과 맞닥뜨리는 관객은 작품 앞에서 번번이 충격을 받게 된다. ‘쇼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적인 미적 범주가 되었다(진중권, 2003, 249).”

  현대예술의 언어는 기존의 고전적 언어와 많이 다르다. 아니, 어쩌면 아예 새로운 언어와 문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그 언어를 모르는 대중들은 그 아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그 환경의 분위기를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와 행동 그리고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현대미술이라는 언어게임의 룰은 뉴비에게 참으로 가혹하다. 그 언어와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작품의 감상과 이해가 요구되며, 그 이해 또한 굉장히 고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현대미술을 예술로써 판단하기 위해선 그 예술 언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미술이 많은 대중들에게 예술로써 판단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기본지식이 없어도 작품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의 미술사적 위치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상자에게 그것은 그저 예쁜 무늬의 벽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숭고

  두려운 자연 현상 앞에서, 혹은 거대한 인공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감, 이것이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 칸트는 피라미드나 성 베드로 성당 같은 거대함이 주는 숭고감을 ‘수학적 숭고(mathematical sublime)’, 쓰나미 같은 압도적 힘에 관련된 것은 ‘역동적 숭고(dynamic sublime)’라고 이름 지었다. 수학적 숭고는 무한한 절대적 크기의 관념에서 나오고, 역동적 숭고는 엄청난 에너지 앞에서의 경외감에서 나온다. 그래서 칸트는 “쉽게 말해 절대적으로 큰 것은 모두 숭고다”라고 말했다.  거대한 것 앞에서 우리의 오성이 그것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심리적 과정을 칸트는 ‘미적 총괄(comprehensio aesthetica)’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숭고란 우리가 이해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한계(limits) 앞에서 느끼는, 일단 부정적인, 네거티브한 체험이다. 이 체험은 언어로도 이미지로도 표상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래도 언어로 표현을 해야만 한다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좀 더 고풍스럽게 ‘형언할수 없는’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방식이 바로 숭고 미학이다(박정자, 62-66). 인용이 길고, 전부였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숭고의 대상은 표현 불가능한 관념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을 전달할 언어가 마땅히 없을 때 우린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숭고란 초월적 경험의 부정적 재현이다.


  과거의 예술이 유한한 대상의 미를 재현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무한한 대상의 숭고를 현시하려 한다. 현대 예술은 형상을 지움으로써 이 세상에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없는 것, 떠올릴 수 없는 것, 그릴 수 없는 것, 한마디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화면은 점점 아름다운 대상들을 게워내고 그 극한에서 마침내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진중권, 2022, 220).


예술의 종교화?

  앞에서 판단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예술작품을 작품이라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았으며, 숭고라는 관념과 현대미술의 언어라는 개념을 통해서 왜 그것이 작품으로 판단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 논하였다. 거창해 보이지만 내가 도출하고자 하는 결론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술의 종교화이다. 예술이란 더 이상 직관적으로 와닿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사변적인 미학이론과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은 더 이상 대중에게 완전히 간파되고, 제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평론가와 예술가들 간의 이해와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그들만을 위한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근친상간에 가족이 아닌 자는 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중은 거기에 참여할 수 없으며, 그 가족이 될 수 없는가? 나는 이 글에서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삼가하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현대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며, 믿어야 작품이 되며, 그 방법은 마치 종교와 같다.


Reference

박정자, 『숭고 미학』, 기파랑, 2023.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아카넷, 2018.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_____, 『미학 오디세이3』, 휴머니스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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