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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n 07. 2024

신화의 메타포

동일자의 보증서이자 그들의 언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 - <아담의 창조>(1512)

  아담의 언어가 사라지고, 바벨의 언어로 소통하는 우리에게 신화란 뜬구름 잡는 소리와도 같을 것이다. 환인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었더니, 100일 후에 곰이 인간 여성이 되었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쑥과 마늘만 먹고 동물이 사람이 되겠는가. 오늘날의 과학지식으로는 도무지 용인할 수 없는 내용이다. 서양에서는 성경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뱀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다고 하는데, 금기를 어긴 연유로 인해서 뱀은 평생 흙을 먹는 저주에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게 과연 상식적인 소리인가 싶을 거다. 뱀이 흙을 먹어? 쑥과 마늘을 먹으면 곰이 사람이 된다고? 텍스트 자체만 놓고 보면 그저 개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리 종교를 믿고, 신봉하는 사람이라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과 신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이 오늘의 주제다. 


신화의 메타포

  신화 속의 이야기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텍스트 그 자체로 보면 너무나도 공상과도 같고, 합리적으로 보기에 어렵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 때문에, 우리가 신화와 종교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뱀이 흙을 먹는다는 소리와 인간의 모습이 바닷가의 파도에 의해 무너지듯이 하는 표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공부가 필요하다. 신화와 종교의 책들은 직접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온갖 비유와 메타포로 가득한 그들의 언어는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에게 어쩌면 아담의 언어로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창세기를 예로 들어보려고 한다. 선악과에 대한 구절은 개인의 종교와 상관없이 아마 대부분 알 것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아담이라는 남성과 이브라는 이름의 여성을 에덴동산에 살게 했는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신의 명령을 뱀의 유혹에 의해서 어기게 되는 그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는 깊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 텍스트의 심연에는 보다 더 큰 의미를 함의하고 있지만, 이 텍스트의 표면에서도 우린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간략하게 창세기에 나온 이 일화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간단하다. 아마 당신이 아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에덴동산이라는 곳에 아담과 이브라는 남녀가 살고 있었다. 하느님은 모든 과일을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허락하신다. 다만 에덴동산에 있는 어느 특정 하나의 나무만 제외하고.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그 나무만 제외하고 다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말하는 뱀이 이브에게 말을 건다. 왜 저 나무의 열매는 먹지 않냐고 묻는다. 그러자 이브는 하느님이 금지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뱀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브에게 말해준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오직 그 열매만 금지하신 이유가 그 과일을 따먹으면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라고 한다. 뱀이 말해준 금기의 이유는 이브가 아는 것과 너무 달랐다. 이브가 알기론 그 열매를 먹으면 죽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열매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은 지위를 가지게 된다니.. 어쩌다 보니 이브는 결국 금지된 과일을 따먹고 만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다른 인간인 아담도 결국 그 과일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은 크게 노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금기를 깨도록 유혹한 뱀에게 하느님은 평생 흙을 먹게 하는 저주를 걸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인간에게 원죄가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이라는 곳에 사는 것과 많은 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하느님이 실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린 금기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합리적 사고를 통해서 우린 뱀이 말을 하고, 뱀이 평생 흙만 먹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동시에 신이 죽는다고 말했음에도 그들은 선악과를 먹고 죽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뭔 소리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창세기의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알레고리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선행적으로 알아야 한다. 먼저 흙. 앞에서 설명할 땐 흙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이 흙을 통해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의 육체를 흙과 같은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이 뱀에게 평생 흙만 먹어야 하는 저주를 내렸다. 그런데 상식상 뱀이 흙을 먹는가? 아마 그런 뱀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흙은 흙(Soil)이 아니다. 그것을 육체를 나타내는 메타포(metaphor)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내린 저주는 토양의 흙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질러버린 인간의 육체를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 하느님은 선악과를 먹게 되면 죽음에 이른다고 아담과 이브에게 경고를 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들이 벌거 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거짓말을 한 것일까? 여기서 하느님이 말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다.


  여기서부터는 내 뇌피셜인데, 플라톤은 인간의 신체를 셋으로 나누었다. 머리, 심장, 소화기관. 머리는 이성을 상징하며, 인식론의 영역이다. 심장은 도덕을 뜻하며, 윤리학의 영역이다. 소화기관은 욕구를 뜻하며, 미학의 영역이다. 차례로 진선미(眞善美)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고로 나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에 의한 영적인 죽음이 이성과 도덕의 영역인 머리와 심장의 죽음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욕심만 남은 인간이 자신의 나체를 인식하게 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중이다. 


  좀 길어졌는데, 결국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나 성경이란 그 자체의 즉물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메타포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인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읽으면 안 된다. 그건 바보와 같다. 이러한 텍스트는 그 텍스트의 지평과 세계를 이해해야 그 심연 속에 담긴 뜻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심연 속의 텍스트 또한 종교적이거나 메타포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심연에 도달해서 그 뜻을 찾아 올려도 그냥 개소리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개소리가 왜 몇천 년 동안 이어져오며, 무슨 의미를 가지길래 아직도 회자되며,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믿고, 공부하는가?


동일자의 보증서 

  앞에서 단군왕검 신화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한국인이라면 아마 다 저 신화를 알 것이며, 믿지는 않더라도 가슴속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적으로 저 신화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그 텍스트의 심연에 도달하면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마저도 저 신화를 담고 산다. 왜 그럴까? 왜 합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를 마음에 담고 살며, 떨쳐내지 않을까? 그건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원을 나타내는 저 신화가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와 상관없이 우린 한국인이다. 어쩌면 저 이야기를 믿느냐, 부정하느냐가 한국인임을 가르는 명제가 될 수도 있다.

  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공존했으나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은 이유가 이들이 서로 공통의 신화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서로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공통의 신화는 종교, 뒷담화, 화폐등이며, 사피엔스가 같이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인원의 수는 15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의 허구를 믿으며, 서로 동일자가 된다. 화폐란 즉물적으로 약품을 바른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허구를 믿는 사피엔스에게 5000원은 그냥 종이가 아니라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란데 사이즈로 바꿀 수 있는 재화이다. 어쩌면 우린 자본주의라는 종교에서 화폐라는 신화를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밈(meme)이나 욕설 또한 그냥 지나가는 언어적 현상이 아니라 동일자의 보증서로서 역할을 한다. 밈이라는 것은 시간적 지평에서 서로가 동일자라는 것을 보증해 준다. 같은 밈을 향유한다는 것은 같이 장소와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사유를 공유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욕설이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모르는 사람에게 하거나 분노한 상태에서 쓰면 폭력적이지만, 유순한 상황에서 친한 친구에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어느 언어보다 더 그들의 우정을 나타내 주는 동일자의 증표가 아닐까?

  언어란 그들이 같은 발음을 발화하며, 같은 랑그(langue)를 사유하는 것 이외에도 사회적인 연대를 형성한다. 언어란 실체 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것보다 더 우리의 사유를 확실하게 나타내는 수단이자 도구이다. 따라서 같은 언어를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신화와 종교는 뜬 구름이 아니었다.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그 심연 속 내용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정의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것을 사유하고, 말하고, 믿는다는 것은 동일자임을 나타내는 의식이자, 엠블럼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자화(一者化)나 전체주의를 주장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왜 이해 안 가는 소리를 공유하고, 그것들이 왜 이어져 오는지 궁금했을 뿐. 왜 곰이 사람이 되고, 뱀이 흙을 먹는다는 소리를 믿는지 그 연유가 궁금했을 뿐이다. 우리는 서사를 공유함으로써 같은 시공간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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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저서 현대미술이 어려운 이유 - 현대미학과 그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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