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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Jun 26. 2024

마네와 모더니티

Manet et modernité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2)

  난해하다고 소문난 현대미술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그리고 굳이 왜 현대(modern)라는 접두어를 붙이면서 까지 과거의 미술과 현대의 미술을 차별하려는 것일까? 이 둘의 차이에 대해 논하다 보면 한 권의 책 혹은 박사학위논문 정도의 분량까지도 글을 쓸 수 있을 거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시작점 전후의 미술의 차이를 먼저 간략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두 가지 정보를 얻는다. 색채와 드로잉과 같은 미적 정보와 그 미적 정보를 바탕으로 해독한 의미 정보.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이 두 가지 정보의 영향을 받는다. 미적 정보와 의미 정보는 어쩌면 작품 내의 필연적인 이항대립구조일지도 모른다. 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미(美)와 숭고(sublime)의 대립, 니체의 예술론에서 디오니소스적 충동과 아폴론적 충동이 필연적으로 공존하듯이. 이처럼 작품에서 미적 정보와 의미 정보는 공존한다. 

  우리가 고전적 예술작품과 현대적인 작품을 비교했을 때, 전자가 후자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이유는 작품 속의 의미정보가 관람자에게 쉽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고전적 작품에서 우린 미적정보를 통해서 미(美)를 관조할 수 있었지만, 현대적 작품에서는 미(美)보다 숭고(sublime)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작품들이 더욱 난해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과거의 미술작품에서 우린 의미정보를 파악하고,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우리는 현대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의미정보를 압도한 미적정보에 의해서 현대의 작품에서 아름다움보다는 그로테스크 혹은 허무함이라는 숭고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현대 미술의 시작점은 숭고(sublime)가 미(美)를 혹은 미적 정보가 의미 정보를 압도하기 시작한 그 순간일까? 


  현대미술의 시작점을 논하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 천사를 그리기를 거부한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를 현대미술의 시작점이라 하고, 혹자는 회화를 고전적 형태와 색채에서 해방시킨 세잔이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또 다른 어느 혹자는 추상화의 탄생을 그 시작점으로 보고, 누군가는 텍스트를 다시 캔버스 안으로 집어넣은 파울 클레를 그 시작점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누가 현대미술의 시대를 열었는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 글에서 나는 누가 현대 미술의 시작점인지 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셸 푸코의 강연을 토대로 마네와 모더니티에 대해서 다뤄볼 예정이다. 미셸 푸코는 조형예술에 대해서 많은 글을 남기진 않았다. 주로 문학에서 영감의 원천을 얻었기 때문이다(MA, 147). 흔히 철학자들의 미학을 논할 때, 특정 작가나 작품에 대한 담론을 접하게 된다. 들뢰즈와 프랜시스 베이컨, 하이데거와 고흐, 리오타르와 바넷 뉴먼 등. 푸코의 미학도 물론 마그리트의 작품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마그리트 작품 해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푸코의 미학은 대체 어떤 매개체를 통해서 설명되는가? 그는 존재 자체를 작품으로 삼고, 실존의 미학에 대해 논한다. 그래서 후기에 연구배경을 고대 그리스로 변경하기도 했다. 여기서 갑자기 푸코의 미학을 논하는 까닭은 마네에 대한 푸코의 해석이 그의 미학이론을 정립하는데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주지하기 위해서 이다. 푸코가 마네를 최초의 모더니즘 화가라고 칭하는 논문을 인상 깊게 읽어서 푸코의 마네론 즉, 마네의 모더니티에 대해서 오늘 다뤄보려 한다.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마네와 인상주의

  마네와 모네. 모네와 마네. 처음 인상주의를 접했을 때, 이 둘의 이름이 너무나 헷갈렸다. 같은 사조와 동시대에 활동했기 때문에 더욱 헷갈렸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을 많이 접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구분이 되고, 더 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더라. 마네와 모네는 정반대의 삶을 산다. 마네는 부유집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모네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여성편력에 대해서도 그 둘은 반대의 성향을 띤다. 마네는 바람둥이였던 반면에 모네는 한 여성만을 사랑하는 순정파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들의 수염색깔까지 반대였다. 모네의 수염은 흰색이었지만, 마네의 수염은 검은색이었다. 그래도 이들에게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바로 살롱전에 낙선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 제도권 미술에 속하기 위해선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마네와 모네 둘 다 그곳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심지어 모네의 <해돋이>는 벽지무늬와 같아서 인상적이라는 혹평까지 받았다. 그래서 이들의 화파가 인상주의가 되긴 했지만. 무튼 마네는 살롱전에 낙선하고 나서 낙선자들의 작품을 모아서 그들끼리 직접 전시회를 열게 된다. 그 첫 전시가 바로 1863년에 열린 낙선전이다. 19세기 미술가들은 관례를 따르고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는 부류와 스스로 선택한 고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류로 크게 나뉘어 이 둘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갔다(HW, 501). 전자의 경우는 살롱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예술가를, 후자의 경우는 낙선전에 참여한 예술가를 일컫는다. 마네는 그들 사이에서 리더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왜 그들은 마네를 리더로 세웠을까? 마네의 어떤 면모가 그들에게 매력적이었을까? 젊은 화가들이 열광한 마네는 ‘끊임없이 지독하게 비난받는 마네’였을 것이고, 그들이 마네의 그림에서 주목한 점은 대중들과 살롱의 심사위원들에게 ‘비난받았던 요소들’이었을 것이다(MM, 123). 제도권에 인정받지 못한 소수 어쩌면 약자들에게 기득권에 반항하는 마네는 그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네의 모더니티

  앞에서 마네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봤는데, 미셸 푸코가 마네에게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계에 반항하는 그의 면모 때문은 아닐 것이다. 미적으로 그가 현대성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김소라는 마네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는 다른 학자들과 비교할 때, 푸코의 독자성은 마네가 어떻게 재현을 통해서 그림의 ‘물질성’을 복귀시켜 나가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MM, 127). 푸코에 의하면 마네는 그림 이 사각형 표면 위에 2차원적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은폐하 려고 했던 서양 회화의 전통을 위반하였다. 브루넬레스키 이래로 서양미술은 2차원의 평면이 아닌 3차원의 가상을 그리는 예술의 연속이었다. 르네상스 이래로 원근법 없는 그림은 아마 스마트폰 없는 현대인과도 같이 시대착오적인 작품이었을 것이다. 

  푸코는 15세기 이래로 잘 다듬어지고 엄격하게 준수되어 온 회화의 법칙들로부터 비켜간 마네의 방법들을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첫 번째는 마네가 어떻게 캔버스의 물질적 특성들이 공간 안에서 작용하도록 만들었는가에 대한 것이며 (캔버스의 공간), 두 번째는 마네가 어떻게 조명의 문제를 취급했는가에 대한 것이고 (조명의 문제), 마지막은 마네가 어떻게 관람자를 움직이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관람자의 위치)(127). 위의 세 가지 항목은 김소라의 논문을 참조하시길.

마네 - <피리 부는 소년>(1866)

  무튼 푸코에 의하면 마네는 그의 재현방법을 통해서 그림의 ‘물질성’을 복귀시키는 점에 주목한다. 그 물질성이라 함은 원근법의 부재에 의한 회화의 평면화를 말하는 것일까? 마네가 인상주의자인지 사실주의자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는데, 나는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고 본다. 인상주의자라기엔 그의 배경의 조명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가 진정 인상주의자였다면, 그는 마치 인물사진을 찍은 것처럼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배경을 날린 이유는 무엇일까.

  푸코에 따르면 마네의 ‘조명법’은 그림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의 그림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마네의 특별한 방법이다. 그에 의하면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 관람자는 그림이 앞면과 뒷면을 가진 평평한 하나의 사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즉 재현적 환영주의의 속임수와 원근법적인 구성의 인위성에 대한 자각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MM, 133-8). 회화에서 재현이 강화되면 재현의 물질적 조건이 드러나지 않는다. 반대로 재현의 물질적 조건이 드러나면 재현은 힘을 잃는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미적 정보의 초월 때문일까? 재현의 강화는 의미 정보의 전달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지만, 재현의 약화는 의미 정보의 전달을 어렵게 한다. 극사실주의 초상화의 경우 우린 그 회화에서 피사체를 본다. 이 경우, 강력한 재현으로 인해서 회화의 물감, 캔버스, 프레임 같은 물질적인 요소가 아닌 예술가가 만들어낸 가상을 본다. 하지만 큐비즘의 경우, 재현을 어느 정도 포기했기 때문에, 피카소의 예술언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 초상화는 그저 캔버스 위에 물감일 뿐이다. 

  푸코에 의하면 마네는 그림의 물질성을 복귀시킨 화가라던데, 이제야 이해가 간다. 원근법이 디폴트값이던 근대인들에게 2차원의 평면을 보여준 마네는 그들에게 의미정보만이 아니라 미적 정보까지 고려하게 만든 현대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이때 푸코가 말한 물질성의 복귀는 그림을 작품으로써 혹은 대자존재로서 의식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사물로서 혹은 즉자존재로서 인식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마네 -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

  개인적으로 마네에게 한 가지 의미를 더 추가하고 싶다. 마네의 그림은 고전적인 회화들과 같은 주제를 그렸음에도 달랐다. 마네의 것에서는 르네상스 대가들의 그림이 보여주는 조화롭고 고상하며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파렴치하고 외설적인 분위기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마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누드 여성들은 영락없이 19세기 파리의 환락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춘부의 모습이다(MM,124). 마네에게는 인상주의라는 태그가 가장 눈에 띄지만 그에게는 사실주의라는 태그도 있다. 그의 사실주의적인 측면은 어쩌면 기득권의 불편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의 예술에서 기인하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모습일지라도 다른 의미를 보여주는 회화. 어쩌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를 창발하며, 불편함을 캔버스에 담는 화가도 마네가 최초일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그가 현대미술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Reference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MA)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역, 예경, 2019. (HW)

김소라, 「미셸 푸코의 <마네>읽기」, 『프랑스문화연구』 제20집, 2010.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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