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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Aug 07. 2024

한계 속 무한한 가능성

Infinity in finity

Gisela McDaniel(1995~) - <Portrait as a Dead (Gutted) Fish>(2021)

  인간의 유한성. 그것이 아마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원인이며, 동시에 반박할 수 없는 진리일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칸트가 인간의 유한성을 단언하며 근대를 열었다고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항상 선택을 한다. 한정된 재화를 가진 개인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 무엇을 구매할지 고민하며, 주어진 공간이나 시간 안에서 실존을 영위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멸하지 않는 인간의 육체는 세속에 대한 집착을 낳고, 인간을 탐욕스럽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고, 한계라는 끝이 존재하기 때문에 삶을 의미 있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1928~)에 의하면 인간이 사용하는 어휘와 문법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유한한 질료 속에서 무한한 형상을 발견한다. 또한 인간은 유한한 캔버스와 유한한 색채 속에서 무한한 표현가능성을 발휘한다. 캔버스의 사이즈는 그 작품의 유한성을 나타낸다. 물론 동일성의 폭력을 거부하는 현대미술은 그 한계마저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의 양태를 자유롭고, 난해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관람자와 작가 모두 인간학적 한계를 가지고, 재료와 공간의 물리적 한계에 의해서 예술작품이란 결국 유한한 형태로 완성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예술 작품의 완성―혹은 형성―이 작가의 의식활동과 물질적 완성뿐만 아니라 비평과 관객의 참여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예술 작품의 닫힘은 진작에 깨졌다. 무엇이든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으며(뒤샹), 예술 작품이라고 꼭 정지해 있을 필요는 없으며, 바닥을 딛고 존재할 필요는 없다(칼더). 따라서 예술의 완성 또한 닫혀있어야만 한다는 것 또한 구시대적 편견일 수 있다. 

  예술 작품의 형성에 대해선 과거에 여러 글로 남겼으므로, 오늘은 예술의 해석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나는 유한한 작품 속에서 무한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이유와 현대의 작품에서 해석이란 고정된 것이 아닌 열려있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1.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일종의 인식이다.  그건 감성을 이용한 인식, 말하자면 감성적 인식이다. 감성적 인식의 토대를 이루는 건 상상, 기억, 감정 등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감성을 인간 정신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매도했다. 바움가르텐이 감성의 권리를 복권시키려 했을 때, 합리주의자로서 그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걸 ‘인식’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와 예술이 일종의 하위 인식 능력이 되었다. 물론 이성에 비하면 이 뚜렷하지 못한 인식은 차원이 낮다. 하지만 이 저급한 인식에도 법칙이 있어, 그걸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가 있다. 그게 바로 미학이다. 미학은 ‘감성적 인식의 학’이며 저차의 논리학이다(AO1, 236-7). 

  회화를 감상하는 행위는 시각적인 인식이며,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청각적인 인식이다. 여기서 인식이라는 단어가 Cogito를 떠올리게 한다. 데까르트의 이 유명한 명제는 주체의 발견이자, 출발점이었으며, 이성주의의 예고편이라 볼 수 있다. 데까르트에게 주체란 절대적으로 자명하며, 세상 모든 것이 환상이어도 생각하는 나 자신만은 거짓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명성은 후대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근대적 주체의 특권적 지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확실히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이다(NF, 22)무의식이론 혹은 정신분석학은 데까르트 이래 실존주의에 이르는 주체이론 전체가 오인과 착각에 기반을 둔 허구, 극복되어야 할 미망임을 일깨웠다(NF, 36). 

  그 결과 주체의 자명성은 무너져 내리고, 내가 모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내가 의식하는 이 제정신은 결코 그 자체로 맑은 것이 아니며, 무의식이라는 혼탁한 심연과 겹쳐져 있다. 따라서 나의 인식이란 나의 자아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초자아(super ego)와 원자아(id) 모두 내 자아(ego)에 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 또한 투명하고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나의 인식, 판단, 사유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 형성된 자명한 주체는 결국 해체되고, 진리라는 고정된 불변이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만이 남게 되었다.

 

  주체와 인식의 자명성이 해체는 예술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간은 인식과 판단 같은 수용적인 측면에서만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작품활동과 같은 행위에서도 그의 무의식은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작품의 본질 또한 작가의 의도 그 자체일까? 그가 그린 행복한 가족에는 어쩌면 그가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열망이나 현실에 대한 도피를 드러내는 알레고리가 담겨 있을 수 있으며, 아니면 진짜로 그냥 행복한 가족의 초상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맞는지 우린 고정적인 해석과 판단을 내놓을 수 없다.

 한 개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온전할 수 없다. 유의식이라도 우린 그의 극히 일부를 보는 것이며, 무의식적인 측면은 당사자도 파악하지 못하는 심연이다. 그래서 한 개인을 이해하고자 하려면 그의 모든 부분을 보아야 한다. 가정적 환경, 학창 시절, 그에게 있었던 사건들 등 개인적인 것 까지 모든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정보를 안다고 해서 그를 100%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그런 그의 정신에 번뜩이는 형상이 나타난다. 그는 악기를 들어 그 형상을 연주하거나, 붓을 들어 캔버스에 그 형상을 그려 넣는다. 그는 이유 없이 캔버스에 사과를 그려 넣었다. 그런데 검은 사과다. 일반적인 사과는 빨간색인데, 왜 그는 검은 사과를 그렸을까? 물감이 없어서? 그럼 물감을 사 와서 그리면 되는데? 그럼 사과가 썩어서? 그렇다면 왜 사과가 썩었을까? 그리고 왜 피사체가 사과여야만 했을까? 화가에게 묻자 그는 "그냥"이라는 심플한 답변을 내놓는다. 결국 그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관람자인 나는 그 검은 사과에 대해서 결정적이고, 고정적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까?

  반 고흐는 돈 많은 감식가의 마음만을 만족시키는 세련된 예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HW, 546). 그래서 그는 농민의 해진 구두를 그려서 그의 농민에 대한 감정을 남긴다. 이때 왜 하필 구두였을까? 그리고 그 구두가 나타내는 것은 최종적 기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앞의 인용문에서 곰브리치가 말한 바가 과연 사실일까? 우린 타자의 기록과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과거를 인지한다. 하지만 그것마저 굉장히 피상적인 것이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따라서 고흐의 소박한 예술에 대한 갈망 또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반 고흐의 동성연인의 구두일 수도 있고, 좌우가 바뀐 한쌍의 구두일 수도 있는 등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다. 어떤 그림도 말로써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말은 때때로 편리한 지침이 될 수 있고 오해를 없애주며 적어도 미술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한다(HW, 576). 우린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 정황상 가장 가능성 있으며, 현실성 있는 해석을 내놓는다. 미술의 역사는 흔히 다양한 양식들의 역사, 즉 여러 양식들이 계승되고 발전되어지는 이야기로 설명될때가 많다(387). 어쩌면 고흐의 구두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농민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작품은 더 잘 이해되어야 할 ‘객관적’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의미의 이해란 곧 독자가 작품을 자신에게, 말하자면 그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짓는 거다. 따라서 그는 매번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작품의 의미는 시대마다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예술 작품은 완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AO2, 159).

  세계 속에 살고 있으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세계의 지식 체계나 가치관(선입관)에 물들어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이 선입관(선이해)를 벗고 세계를 ‘맨눈으로’ 보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선이해야말로 이해의 전제 조건이다. 이해의 전제 조건이 되는 선이해의 체계를 이해의 ‘지평’이라 부른다(AO2, 166).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나는 나의 선이해 체계를 가지고 있다. 나의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 작품의 본질이라면 나는 그것을 파악할 수 없다. 어쩌면 작가의 의도 혹은 무의식적 영감은 우리의 지평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린 그저 우리의 지평에 맞게 그림을 이해하려 시도했으며, 그 지평에 맞게 왜곡된 본질을 파악한 것일 수도 있다.


2.

  오늘날의 예술에선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에 문을 열어놓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 예술 작품은 완성품의 형태로 독자에게 배달되지 않는다. 현대 예술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을 에코는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열린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일률적으로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독자는 작품 속에 들어가 작품을 스스로 완성하는 가운데, 거기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예술은 ‘움직이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AO2, 271). 

  칼더의 모빌은 비선형적인 운동을 한다. 시곗바늘은 선형적인 운동을 해서 예측가능한 공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칼더의 모빌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외부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시계는 시간적, 공간적 지평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똑같이 작동한다. 그러나 칼더의 모빌은 계절에 따라 바람의 영향을 받고, 설치되는 위치에 따라서 각도가 달라질 수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예측할 수 있는 동일자화된 관례나 규범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각 개인에게 다른 감상을 주며, 때론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아담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

  모든 존재자는 능동적으로 해석에 참여하고 또한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의 관점을 지닌다(NF, 169).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저마다의 지평으로 고정된 해석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가능성. 그것이 액자라는 유한한 공간에 갇혀있는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무한한 가능성이자, 그 본질의 부정성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구조주의 이래로 주체의 자명성은 기만으로 폭로되었다. 따라서 예술에 대한 해석 또한 해체되었다. 그림의 고정된 의미? 그런 건 중세시대 이콘화에서나 가능하다고 본다. 무의식의 발견과 니체의 망치 이후 본질에 대한 해체가 이루어졌으며, 위계 없는 차이의 향연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림에 대한 고정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품이라는 한정적 물질 속에서 우린 무한한 해석을 도출해 낼 수 있으며, 무엇이 정답인지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그림에 대한 해석? 그건 주관적인 것이다. 남들이 아름답다고 해서 무조건 동조할 필요는 없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고 무조건 그대의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무명의 작가라도 혹은 초등학생이 방학숙제로 제출한 그림도 충분히 누군가에게 아름다울 수 있으며, 감동을 줄 수 있다. 개인이 해체되고, 주체성이 소멸된 현재 우린 예술을 통해서 개인의 미학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Reference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1』, 휴머니스트, 2015. (AO1)

_____, 『미학 오디세이2』, 휴머니스트, 2022. (AO2)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 이종숭 역, 예경, 2019. (HW)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창비, 2021. (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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