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것이 윤리적으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뭘 선택하던 그건 채점할 수 없으며, 존중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대를 가던지 아니면 열심히 정치운동을 해서 특검이나 탄핵을 외치던지 아니면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하던, 그 누구도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 자체론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와 역할이 부여된다. 형은 남동생이 있어야 가능하고, 부모님은 자식이 있어야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등도 그 뒤의 2,3등과 최하위권까지 있어서 가능하다. 결국 나의 얼굴은 타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권력관계를 파악하고, 우리는 자기 자신과 그 위치를 확인한다.
무한 경쟁사회에 구조주의 인문학은 어쩌면 진부하다. 모두가 피라미드 꼭대기를 원하기에 하부층의 다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구조주의 인문학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그들에게 힘을 주면서, 그들의 성원으로 상부층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하긴 노동과 부가 인간의 본질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렇게 돈 버는 게 문제가 될리는 없지. 하지만 이젠 그 패턴이 너무나도 뻔한 클리셰가 되었다.
우린 우리의 행복구조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마치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책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작가와도 같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는 이상 '부'의 영역은 결국 그 견고한 에피스테메라는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왕위를 이을 왕세자로 유력한 후보도 없다. 우린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으로 인하여 세상이 굴러가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 할 때, 우린 세속적으로는 '돈'이라고 말할 것이고, 낭만적으로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할 것이다. 근데 지금 우린 행복이라는 것을 돈이라는 아르케(arche)를 통해 추구하므로, 결국 이 질문의 답은 돈에 대한 순환고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건 이 글의 시작점과 같이 절대적인 답이 없다. 오히려 그 고민을 하는 행위가 답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본질은 끊임없는 차연(differance)으로 인해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utopie)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어도 다른 것을 다시 추구하게 되고, 다시금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결국 인간의 본질은 무(無)인가? 아니면 정해진 구조적 위치에서 이탈하며 스스로를 미학적으로 형성하는 구조주의에서 파생된 존재론적 미학이 맞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Was soll ich tun? 무한한 존재이던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한정한 칸트는 제2 비판서로 인간이 윤리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규정하였다. 어쩌면 칸트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 한계 안에서 답을 찾으려 했나 보다. 그런데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그건 답이 될 순 있으나 절대적인 정답이 될 순 없을 것으로 보인다. 칸트의 Was soll ich tun? 은 닫힌 질문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그의 이론 내에서 나름의 결론을 통해서 정답을 산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그 질문은 다시금 열린 결말이 되었다. 유한한 인간에겐 무한한 자유의지가 있고, 무한한 가능성이 그의 실존에 도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도달할 수 없는 답을 숨기고 있는 난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잘난' 혹은 '잘된' 사람들을 모델 삼아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돈 잘 버는 의대를 지망하게 되었고, 그 잘난 사람들이 사는 압구정, 성수, 한남, 청담에 살고 싶어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의 이데아를 꿈꾸게 되었고, 누가 더 그 형상에 가깝느냐가 성공 혹은 행복의 척도가 되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이 질문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세속적으로 이 질문은 어느 지점에 도착해야 할까에 대한 목적론적 고민이 아닌 그 지점에 어떻게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실존은 예술이 아니라 공업적 마라톤이 되었다. 그저 숫자와 타자와의 위치관계를 척도로 그 존재에 점수를 매긴다.
우린 마라톤 속을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위치관계와 숫자라는 기록으로 존재를 평가 혹은 판단할 수 없다. 결국 이 레이스는 앞의 질문과 같이 열린 결말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종점이며, 내가 마지막에 추구한 것이 정답이 될 것이다. 그러니 감히 고민해라! 고민을 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변화의 시작이자, 존재에 대한 예술적 사유를 행하는 것이다. 캔버스를 앞에 둔 예술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고민을 마치고 마침내 붓을 들고 작품을 만든다. 이와 같이 우리도 각자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보고, 나름의 목적지를 추구해야 한다. 고로 내가 잘살고 있나 고민하는 것은 굉장히 건강한 고민이다. 공업적인 실존 속에서 고민할 순간은 시간낭비다. 하지만 미학적인 실존 속에서 고민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예술이다.